게시판

 

언어

삶(주고,받기)

문학

대입 수학능력시험

입시정보

우리소개

 

  
3 7

게시판

상담실

빠른메뉴

 

설문조사

려증동

이 말은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뚫고 세상밖으로 나올려고 힘쓸 때에 어미 닭이 입부리로 꼭 쪼이면 병아리가 알 밖의 세상으로 소리를 지르며 나온다는 말입니다. 알 속의 병아리 처럼 학생들도 어둠 속 세계에서 밝고 넓은 세계로 나올려고 노력할 때 시기 적절하게 문리를 터 주는 스승의 혜안을 말한다.

 

jultak.jpg

가자! 자바의 세상으로/상태선에 년,월,일 시간을 표시

아래 상태선을 보세요. 날짜/시간이 보입니다.


  강준호(2017-08-09 08:40:49, Hit : 23, Vote : 6
 http://cafe.daum.net/jinjujunho
 구언(求言)하는 전지(傳旨)에 응하는 소〔應旨疏〕

구언(求言)하는 전지(傳旨)에 응하는 소〔應旨疏〕 선문대왕(宣文大王 효종) 7년(1656) 병신년 3월, 공이 해남(海南)에 있을 때 지었다.

삼가 아룁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구언(求言)하신 전지(傳旨)에서 운운하셨습니다. 전하께서 빈번하게 구언하시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자는 필시 형식적인 말씀이라고 할 것입니다마는, 신은 전하께서 너무 걱정스럽고 황급하여 어찌해야 좋을지 모른 나머지 신민(臣民)에게 도움을 청하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측은하게 여기시는 그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이 전일에 올린 소장(疏章)의 먹물이 아직 마르기도 전에 다시 위언(危言)을 바쳐 올린다면, 군신 간에 잘잘못을 따지다가 의리를 상하는 경계를 범하는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더군다나 정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도(道)가 드러나지 않고, 정직하게 말하면 사람들이 많이 시기하여, 아무 소용도 없이 그저 화(禍)를 부추기기에 적당할 것인 데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렇긴 하지만 군부(君父)가 도움을 구하는 것이 이미 절실한 이상에는, 초야(草野)의 신하라 할지라도 응당 전지(傳旨)에 응해야 할 것인데, 더구나 신처럼 진퇴(進退) 간에 총애를 받고 생사 간에 은혜를 입은 자가 어떻게 감히 자기 한 몸을 위한 계책만 세우면서 입을 다물고 모른 체할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어리석은 소견을 다시 토로하여 천의(天意)에 답변을 올리게 된 소이입니다. 신의 발언은 실로 혈성(血誠)에서 나온 것이니, 삼가 원하옵건대 전하께서는 참으로 유념하시고 제대로 살펴보시어, 좋아하기만 하고 추슬러 보지 않거나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 것에 대한 성인(聖人)의 경계를 범하지 마소서.

아, 변고는 그냥 생기지 않는 것으로, 하늘의 노여움은 도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나에게 노여워하는 하늘은 나를 버린 하늘이 아니니, 하늘의 밝은 명을 돌아보아 병에 걸린 것처럼 두려워하고, 서슴없이 허물을 고쳐 물이 흐르는 것처럼 선(善)을 따른다면, 재이(災異)를 바꿔 길상(吉祥)으로 만드는 것이 또 뭐가 어렵겠습니까. 그러므로 명주(明主)가 어진 말을 하자 형혹(熒惑)이 홀연히 일도(一度)나 옮겨 갔고, 현상(賢相)의 선마(宣麻)를 내리자 혜성(彗星)이 단비로 바뀌었으니, 하늘과 인간이 감응하는 이치가 대개 이와 같습니다.

아, 하늘의 위엄을 가라앉히려면 하늘의 뜻을 찾아보아야 합니다. 하늘이 일단 억조(億兆)의 백성을 인주(人主)에게 대신 맡겼고 보면, 하늘이 인주에게 책망을 가하는 것은 민생을 안정시키는 일에 잘못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백성이 아래에서 원망하면 하늘이 위에서 노여워하는 것이니, 이는 바로 만고토록 바뀌지 않는 떳떳한 도리입니다.

신이 지난해 겨울의 소(疏)에서 진달한 사폐(四弊)는 모두 민생의 안정에 중점을 두고 살핀 것인데, 민생을 안정시키는 것이야말로 재이(災異)를 막는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서경(書經)》의 이른바 “하늘의 밝고 무서움이 우리 백성의 밝고 무서움으로 인한 것이다.〔天明畏自我民明畏〕”라는 말이야말로 진정 격언(格言)이니, 다른 데에서 구하려 하면 안 될 것입니다.

신이 지난해 11월 30일에 삼가 도신(道臣)을 통해서 전유(傳諭)하신 성비(聖批)를 받아 보고는 감격하고 황공하여 망가진 수레에 탄 것만 같았는데, 천어(天語)가 온유(溫柔)하여 완연히 지척에서 안화(安和)한 용안을 뵙는 것만 같았습니다. 하우(夏禹)가 좋은 말을 들으면 절했다고 하지만, 어찌 이보다 더하기야 했겠습니까. 신은 삼가 전하를 위해 탄복하며 만세토록 무강한 복이 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신이 듣건대, 비국(備局)이 각 조목마다 방계(防啓)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이때에 마음속으로 중얼거리기를 “당초에 우모(訏謨 조정의 원대한 계책)가 신의 의견과는 이미 어긋났으니, 전하께서 비국으로 하여금 신의 소(疏)를 의논하게 한 것은 바로 연인(燕人)으로 하여금 영서(郢書)를 좋아하게 하는 것과 같다. 번쩍 깨우쳐 깨닫는 것은 사람에게 어려운 일이요, 잘못을 합리화하며 꾸며 대는 것은 사람들의 상정(常情)이니, 비국이 방계한 것을 괴이하게 여길 것이 뭐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옛날 한 고조(漢高祖) 때에 삼걸(三傑)이 국가의 계책을 세우면서, 모두 낙양(洛陽)에 도읍하는 것이 장안(長安)에 도읍하는 것만 못하다고 말하지 않았는데, 누경(婁敬)이 수레를 끌던 수졸(戍卒)의 신분으로 알현을 청하여 말한 뒤에야 장량(張良)이 비로소 누경의 설이 옳다고 하였습니다. 누경이 비록 모든 면에서 삼걸보다 못하다고 할지라도, 이 하나의 일만은 삼걸이 누경보다 못하였습니다. 옛날에 “지혜로운 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잘못이 있고, 어리석은 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옳음이 있다.”라고 말한 것이 어찌 신실(信實)하지 않습니까.

지금 비국(備局)의 신하가 비록 훌륭하다 할지라도 필시 삼걸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요, 신이 비록 지극히 용루(庸陋)하다 할지라도 어려서부터 배우면서 천하로써 자기의 임무를 삼았고 보면 국가의 계책을 세우고 시무를 인식하는 것이 반드시 누경보다 못하지는 않을 터인데, 비국이 자기를 버리고 남을 따르는 것이 장량과 같지 않은 것이 개탄스러울 뿐입니다.

근일에 비국(備局)의 관자(關字 지시 공문)를 얻어 보건대, 해도(海島)의 주민을 축출하지 말라는 하나의 조목이 전하의 결단에서 나왔으므로, 일이 모두 이와 같이 되기만 하면 바람직하게 해결될 희망이 보이기에 신이 삼가 기뻐하며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더구나 1만여 호(戶)의 수만 인구(人口)가 마음속으로 전하를 사랑하며 떠받드는 것이 또 어떠하겠습니까. 기타 세 조목에 대해서는 전하께서 어떻게 하실 요량이십니까.

송(宋)나라 태조(太祖)가 장제현(張齊賢)의 열 가지 계책을 보고 어떤 계책이 좋다고 하자, 장제현이 다른 계책들도 모두 좋다고 극구 일컬었는데, 신 역시 장제현의 뜻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중에 시노(寺奴)의 한 조목은 특히 긴급한 사안이니, 전하께서 통쾌하게 결단을 내려 모두 신이 건의한 대로 행하지 않는다면, 참으로 백성의 마음을 크게 기쁘게 하여 하늘의 뜻을 빨리 돌릴 수가 없을 것입니다.

산성(山城)의 한 조목에 대해서는 그때에 상세히 논하였으므로 지금 다시 되뇌지 않겠습니다. 그런데 저번에 장흥(長興) 사람에게서 들으니, 근일에 그 부(府)에서 장성산성(長城山城)에 전운(轉運)하는 역(役)이 있었는데, 조(租) 1말(斗)을 전운하는 가미(價米)가 2말이었다고 합니다. 한 번만 전운을 해도 백성이 고생하고 재물이 손상되는 것이 엄청날 것인데, 누차 전운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1개 읍(邑)만 전운을 해도 그 해로움이 무궁할 것인데, 타읍(他邑)도 모두 전운한다면 그 해로움이 어떠하겠습니까. 쓸모없는 산성 때문에 백성을 해치는 것이, 이 하나의 작은 일만 거론해도 이와 같으니 실로 개탄할 만합니다. 대개 비국(備局)의 주획(籌畫)이 이미 신의 주획과 다른 이상, 그 간택(簡擇)은 오직 임금님의 조감(照鑑)에 달려 있고, 그 판단은 오직 임금님의 결단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지난번 자전(慈殿)의 어소(御所)에 대한 역사(役事)가 비록 성상(聖上)의 지극한 효성에서 나온 것이긴 하지만, 이는 바로 열성(列聖)이 태평 시대에도 하지 않던 바인데, 더구나 이처럼 백성이 곤궁하고 재물이 고갈된 때이겠습니까. 비록 민력(民力)을 번거롭게 하지 않는다고 하였지만, 신이 가만히 듣건대 벌목(伐木)하고 재목을 나르는 역(役)으로 백성을 수고롭게 하고 재물을 소모하게 하는 것이 이미 한정이 없었다고 하니, 이는 충신(忠臣)이 들으면 모두 검은 머리가 하얗게 셀 것이 분명한 일로, 신 역시 이 일을 생각함에 숨이 막힐 것만 같았습니다.

그런데 성명(聖明)께서 그 잘못을 깨닫고는 정파(停罷)하셨으니, 이는 참으로 《역(易)》에서 말한 불원복(不遠復)이라고 하겠기에, 처음 저보(邸報)를 접하고는 신이 참으로 나막신 굽이 부러지는 줄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매사가 이와 같이 된다면 태평 시대도 이루기 어렵지 않을 것인데, 민생을 안정시켜 재이(災異)를 막는 것쯤이야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신이 멀리 외진 지방에 거하여 이 밖에는 들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만, 눈으로 직접 본 것을 가지고 논해 볼까 합니다. 바닷가의 백성들이 생계를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만백성이 너도 나도 원망하며 마치 물과 불 속에 들어 있는 것처럼 느끼는 것은, 대개 요부(徭賦 요역(徭役)과 부세(賦稅))가 너무도 심하게 번거롭고 중하기 때문입니다. 신이 부로(父老)의 말을 듣고, 부로의 기록을 보건대, 지금의 요부는 수년 전에 비해서 세 배나 더 많다고 하였습니다. 수년 전에도 민간이 원래 간난(艱難)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질고(疾苦)가 없는 것도 아니었는데, 지금은 그때보다 세 배나 더 부담이 많고 보면, 백성이 생계를 제대로 꾸리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아, 한 선제(漢宣帝)가 “나와 함께 다스릴 자는 바로 우수한 태수(太守)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임금과 함께 다스릴 자를 가려서 만약 적임자를 얻기만 한다면, 아무리 국가에 일이 많은 때라 하더라도, 살갗이 벗겨지고 뼛골이 부서지며 눈썹을 사르고 심장을 도려내는 듯한 고통이 어찌 이 지경에까지 이르겠습니까. 사방 인근의 경우, 귀로 듣고 눈으로 보는 것마다 모두 예외 없이 이처럼 완연히 한 모양이니, 이 하나의 사례를 통해서 유추해 보건대 팔로(八路)도 필시 모두가 그러할 것입니다. 이는 전하께서 하신 일이 아닌데도, 백성들은 마음속으로 반대하며 원망하고 입으로 저주를 퍼부어, 임금의 한 몸에 원망이 집중될 것이니, 신은 통분하기 그지없습니다.

아, 하늘이 인재를 낼 적에 상품(上品), 중품(中品), 하품(下品)이 있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중품이 원래 많고 상지(上智)와 하우(下愚)는 적은 법인데, 오늘날 세상에서 임용되는 사람을 보면 모두가 하품 일색입니다. 아, 꼭 하품을 가리려 하더라도 어떻게 많이 얻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모두가 하품인 것은 무엇 때문인지 신이 실로 괴이하게 생각하였는데, 가만히 그 까닭을 유추해 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대개 상품의 사람은 원래 흠을 잡을 수가 없고, 중품의 사람이라 할지라도 염치는 있는 법인데, 오직 하품의 사람만은 노비의 안색으로 비굴하게 무릎을 꿇고 밤늦도록 애걸을 하니, 임용되는 것이 대부분 이런 자들인 것은 이 때문입니다. 어느 때나 사람을 위해서 관직을 가리지 않고, 관직을 위해서 사람을 가리는 날을 보게 될는지, 참으로 길게 한숨 쉬며 탄식할 일입니다.

하품의 사람이 고을을 맡게 되면, 향소(鄕所)도 거리낄 것이 없고 이서(吏胥)도 거리낄 것이 없이 행동합니다. 그리고 간사한 백성들은 뇌물로 결수(結數)를 숨기는 반면에, 선량한 백성들만 그 고통을 대신 받게 마련입니다. 또 백성의 부세(賦稅)를 출정(出定)할 때에 과람(過濫)하게 마련하는가 하면, 봉상(捧上)한 뒤에도 화소(花消 낭비)한 것이 많아서 관고(官庫)가 결딴나면 또 백성에게 징수하곤 합니다. 계학(谿壑)처럼 욕심을 부리는 일이 한두 가지만도 아니고 서너 가지만도 아니라서, 백성의 재물로는 미려(尾閭)로 빠져나가는 것을 대 줄 수가 없는 형편입니다.

아, 임금과 함께 다스릴 관원으로 적임자를 얻지 못한다면, 비록 서주(西周) 시대의 아름다운 정사가 날마다 전교(傳敎)로 나오고, 영진(嬴秦) 시대의 준엄한 법령이 날마다 관자(關字 공문)로 하달된다 하더라도, 실제로는 아무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하나의 일을 예로 들어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신은 보길도(甫吉島)를 사랑합니다. 그곳은 천석(川石)의 경치가 뛰어나서 귀신이 깎고 새긴 듯하니 인간 세상에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맑은 기운이 모여 있어서, 눅눅하게 비린내가 풍겨 오는 때는 없고 청랭(淸冷)하게 상쾌한 날씨만 있으며, 산봉우리가 주위를 에워싸고 파도 소리가 미치지 않아 단지 산의 정취만 느낄 뿐 바다 가운데인 것은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출입하고 왕래하며 소요(逍遙)하고 서식(棲息)한 지가 벌써 20년이나 되었는데, 그동안 좀도둑들이 몰래 베어 갔는지는 본디 다 알 수가 없습니다마는, 관인(官人)이 방자하게 송판(松板)을 사적으로 벌채한 일은 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신에게 “그대가 여기에 온 뒤로 가사(家舍)에 모두 잡목을 쓰면서, 자기 몸만 단속한 것이 아니라 거느리는 자들도 엄히 금하였다. 그런 까닭에 영문(營門)과 진포(鎭浦)에서도 꺼리지 않음이 없어서 감히 송판(松板)을 벌채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명월(明月)이 무심하게 비추지만 투아(偸兒 도둑)는 그 빛을 저어하고, 나의 칼이 너의 죄를 묻지 않아도 부끄러운 생각이 벌써 심간(心肝)에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신이 말하기를 “어찌 그렇기야 하겠는가. 영문(營門)이 나의 경내에 있어서 바다를 관장하는 자들이 하는 일을 들어서 알지 못하는 것이 없는데, 김체건(金體乾)은 무변(武弁) 중의 군자(君子)로서 훌륭한 사람이고, 윤창구(尹昌耇)는 노년에 이른 편모(偏母)가 있는데도 소나무를 베어 수기(壽器 생전에 만들어 두는 관)를 만들지 않았고, 정집(鄭檝)은 늙은 누이의 아들이 찾아와서 수기(壽器)를 구하자 손을 내저어 물리치며 ‘내가 금송(禁松)하는 관원인데 어떻게 나 자신이 국금(國禁)을 범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한다. 이것이 바로 관하(管下)가 감히 그런 생각을 내지 못하는 까닭으로, 본디 국가가 인재를 얻은 효과라고 할 것이니, 나와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지난봄에 육지로 나온 뒤에 잠시 두세 명의 노복을 거기에 머물게 하여 빈집을 지키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전일에 수영(水營)의 군관(軍官)인 오계룡(吳繼龍)이란 자가 편수이장(偏首耳匠 도목수) 춘발(春發) 등 13명을 이끌고는, 청산도(靑山島)에서 넓은 송판(松板)을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고, 또 소안도(所安島)에서 구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보길도(甫吉島)에 벌목하러 왔다 합니다. 그러고는 오계룡과 이장(耳匠)의 무리가 신의 노막(奴幕)에 머무르면서 13일 동안 벌취(伐取)하였는데, 그 송판이 지극히 넓고 지극히 두꺼워서 운반하기 쉽지 않자, 근방 여러 섬의 백성들을 모조리 불러다가 끌고 내려갔다 합니다.

그리고 오계룡이 말하기를 “단지 10개의 관재(棺材)로 50닢(立)만 베었을 뿐이요, 나머지는 돛으로 쓸 대나무 한 개와 노(櫓) 한 개다.……” 했다 하는데, 10개의 관재 이외에 달리 더 벤 것이 전혀 없는지 어떻게 알 수 있겠습니까. 조가(朝家)에서는 소나무 때문에 만백성의 목숨을 헤아릴 틈도 없이 바야흐로 모조리 축출하려고 호령이 산처럼 엄숙하기만 한데, 오계룡이란 자는 조금도 거리낌 없이 이처럼 제멋대로 굴었으니, 이것을 가지고 보더라도 사람을 가리지 않고서야 어떻게 금지하는 명령이 행해질 수 있겠습니까.

비언(鄙言)에 이르기를 “벽력(霹靂)의 하늘도 기만할 수 있고, 여수(女嬃)가 두들긴 다듬잇돌도 손에 넣을 수 있다.”라고 하니, 하품의 사람이 하는 짓은 모두가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관재(棺材) 10개의 송판이야 구우일모(九牛一毛)와 같으니 아까울 것이 없다고도 하겠습니다만, 백성을 가까이해야 할 관원이 백성을 해치는 정사는, 숫자로 세어서 두루 다 알 수가 없을 정도이니, 애처로운 우리 민생은 어느 곳에 호소할 수나 있겠습니까.

아, 수령 백 명 천 명 가운데에 어쩌다가 한 명쯤 특별히 뛰어나 아름다운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직임에 오래 있지를 못하니, 그 까닭은 무엇이겠습니까. 남에게 아첨하며 구차하게 구는 마음이 조금도 없어서 함께 스스럼없이 어울리지를 못하기 때문이니, 이는 마치 숲 속의 빼어난 나무는 바람을 맞아 부러지고, 해안의 돌출한 언덕은 물에 쓸려 깎이는 것과 같다고 하겠습니다.

신이 향중(鄕中)의 사인(士人)에게서 듣건대, 무자년(1648, 인조26) 연간에 전황(田滉)이 현감이 되었는데, 정사가 강명(剛明)하여 관청의 일이 모두 제대로 거행되고 아전이 간사하게 굴지 못했으므로 한 경내가 편안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포폄(褒貶)하는 시기가 다가오자 해리(該吏)가 나아와서 아뢰기를 “포폄할 때가 되면 상정청(詳定廳)의 목면(木綿) 몇 동(同)을 순영(巡營)의 영리(營吏) 등에게 꼭 보내야 합니다. 우리 현(縣)뿐만 아니라 다른 읍(邑)도 대부분 그렇게 하여 이미 규례로 굳어졌으니 무시하면 안 됩니다.”라고 하자, 전황이 이르기를 “수령의 등제(等第)가 어찌 영리에게 있단 말인가. 또 민결(民結)을 거두어서 어찌 다른 곳에 쓸 것인가. 내가 비록 내일 파직되어 떠나더라도, 결단코 그런 일은 할 수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그 뒤에 결국 폄출(貶黜)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민간에서는 차구(借寇)할 길이 없어서 지금도 탄식하며 애석해하고 있다 합니다.

이것은 물론 방백(方伯)이 밝지 못한 탓입니다. 그렇긴 하지만 조정은 외방(外方)의 근본이 되는 곳이니, 먼저 조정에서 관원에 적임자를 제대로 얻었다면 외방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조정에서 적임자를 어째서 얻지 못하는 것인지 신이 또 가만히 유추해 보건대 대개 그렇게 되는 까닭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는 붕당으로 삼분오열되어 있는데, 하나의 당파가 뜻을 얻으면 다른 당파는 모조리 배척합니다. 외지고 조그마한 나라에 인재가 많지도 않은 터에, 단지 3분의 1 혹은 5분의 1의 인재만을 가지고 그중에서 쓰려고 하니 어찌 관원에 적임자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지극히 편파적인 자가 지극히 편파적으로 의망(擬望)하여, 요진(要津 요직)에 거하는 자가 지극히 편파적인 자 아님이 없음이겠습니까. 고어(古語)에 “공정하면 사리를 밝게 살필 수 있고, 편파적이면 사리를 살피는 것이 어두워진다.〔公生明 偏生暗〕”라고 하였는데, 지극히 편파적이면서 어떻게 사리를 제대로 식별하겠습니까.

신이 선조(先朝) 때부터 사람들이 명사(名士)라고 말하는 자들을 살펴보았는데,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으면 민첩하게 대응을 잘하고, 그들이 주선하는 것을 보면 익히 잘 처리합니다마는, 몸을 닦는 요체라든가 나라를 경륜하는 계책에 있어서는 모두 어둡기만 하였습니다. 조정이 이러한데 사방을 어떻게 바로잡을 수가 있겠습니까. 혹시라도 그들과 같은 당(黨)이 아니면서 그 사이에 뒤섞여 끼어든 자가 있다면, 그런 자는 필시 그지없이 물러 터지고 흐늘흐늘하기만 하며 모나지도 않고 둥글둥글하기만 해서, 주야(晝夜)로 꾀하는 것이 단지 녹봉이나 유지하고 자리를 보전하는 데에 있는 사람일 것이니, 이러고서야 어떻게 국가에 이렇다 할 기여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고 보면 내외의 관원이 모두 적임자가 못 되니, 지혜 있는 자는 숨어 버리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만 벼슬자리에 있다는 말과 불행히도 가깝다고 할 것입니다. 그러니 국가의 일을 생각하면 어찌 가슴 떨리는 심정을 금할 수가 있겠습니까.

노(魯)나라 애공(哀公)이 정치하는 도리를 묻자, 공자(孔子)가 맨 먼저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이 행한 정사가 지금도 서책에 서술되어 있으니, 그 정치를 행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정치가 행해지는 것이고, 그런 사람이 없으면 그 정치도 없어지는 것이다. 사람의 심리는 정치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땅의 생리는 나무에 민감하게 반영된다.”라고 고하였는데, 자사(子思)가 그 말을 《중용(中庸)》에 기술하여 만세(萬世)의 대훈(大訓)으로 삼았습니다. 적임자를 얻지 못하고서 좋은 정치를 한다는 것은 이치상 불가능한 일로 신이 아직까지 듣지 못했던 바입니다.

옛날에 제 위왕(齊威王)은 직경 한 치의 구슬을 보배로 여기지 않고 네 명의 신하가 천리(千里)를 비춘다고 말하였으며, 연 소왕(燕昭王)은 병력(兵力)과 군량(軍糧)과 성지(城池)와 군기(軍器)를 묻지 않고 단지 “참으로 유능한 인재를 얻어 그와 함께 나라를 다스려서 선왕의 치욕을 씻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鎖賢士與共國 以雪先王之恥 孤之願也〕”라고 말하였습니다. 위왕과 소왕 두 임금이 무엇을 배웠기에 반드시 인재로써 치국의 근본을 삼았겠습니까. 전하의 성명(聖明)함에 비추어 볼 때, 어찌 이 두 임금의 소견에 미치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위왕(威王)은 사신을 보내 아(阿)를 살피고 즉묵(卽墨)을 살피게 해서 모두 그 실상을 파악하였는데, 어떻게 해서 제대로 살피고 반드시 속이지 않는 사람을 얻어 그를 사신으로 보낼 수 있었겠습니까. 위왕이 얼마나 고심하고 일을 밝게 살폈는지 대개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소왕(昭王)은 곽외(郭隗)의 말을 듣고는 건물을 다시 지어 그를 사사(師事)하였으니, 그가 말을 듣고서 깨닫고 통쾌하게 결단을 내린 것을 대개 상상할 수 있습니다. 전하께서 이렇게 하실 수 있겠습니까. 위왕이 처음에는 잘 다스리지 못했지만 8년 뒤에는 크게 다스릴 수 있었습니다. 전하께서 임어(臨御)하신 지 이미 8년이 되었으니, 신이 또한 그렇게 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하께서 재이(災異) 때문에 직언(直言)을 구하셨습니다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하늘의 뜻을 돌릴 방도가 오직 민생의 안정에 있고, 민생을 안정시킬 방도는 오직 인재를 얻는 데에 있다고 여겨지기에, 기휘(忌諱)해야 할 일을 완전히 잊고서 있는 성의를 모두 다하여, 전하를 위해서 누누이 말하며 멈출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또 한 가지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태양은 모든 양(陽)의 으뜸으로 인군(人君)의 상징이요, 백홍(白虹 흰 무지개 같은 흰빛의 무리)은 음(陰)의 사특한 기운으로 화란(禍亂)의 씨앗입니다. 백홍이 해를 꿰뚫는 변고는 대개 음이 양을 올라타고 양이 음에 억눌린 것을 의미합니다. 음양을 가지고 인사(人事)에 비유하여, 양을 붙들어 일으키고 음을 억눌러 제어해야 한다는 설이 경전(經傳)에 자세히 보이니, 지금 꼭 일일이 거론하여 죄다 설명할 것은 없고, 우선 시무에 절실하고 긴급한 것만을 간략히 전하에게 진달할까 합니다.

군자는 양이고 소인은 음이니, 군자가 나아오고 소인이 물러가면, 어찌 백홍관일(白虹貫日)의 변이 있겠습니까. 군부(君父)는 양이고 신첩(臣妾)은 음이니, 군주의 권위가 신장되고 신하의 권세가 수렴되면, 어찌 백홍관일의 변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문(文)은 양이고 무(武)는 음이니, 문을 위로 하고 무를 아래로 하면, 어찌 백홍관일의 변이 있겠습니까.

아, 국인(國人)은 모두 병사(兵事)를 좋아하고 무예를 중시하는 일로 전하에 대해서 마뜩치 않게 여깁니다마는, 신은 전하께서 그냥 병사를 좋아하고 그냥 무예를 중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자강(自强)하려는 계책에서 나온 것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대개 이렇게 하는 것도 부득이한 일이겠습니다만, 자강의 계책은 이렇게 하는 데에 있지 않습니다. 신이 전하를 위해 설명을 드릴까 합니다.

옛날에 주왕(紂王)에게는 억만(億萬)이 있었지만 억만의 마음이었고, 주(周)나라는 3천이 있었지만 하나의 마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왕은 망하고 주나라는 흥했으니, 강약이 과연 병력(兵力)에 있겠습니까. 단지 인심을 얻느냐에 있을 뿐입니다. 항우(項羽)는 누차 승리했지만 멸망하였고, 한 고조(漢高祖)는 누차 패하였지만 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뒷사람이 시를 짓기를 “강강하면 반드시 죽고 인의로우면 왕이 되나니, 음릉 땅에서 길 잃은 것은 하늘이 망친 것이 아닐세.〔剛强必死仁義王 陰陵失道非天亡〕”라고 하였으니, 강약이 과연 무력(武力)에 있겠습니까. 단지 인의(仁義)에 있을 뿐입니다.

범중엄(范仲淹)이 연주(延州)를 다스리자 하인(夏人)이 서로 경계하여 말하기를 “연주에 뜻을 두지 말라. 소범노자의 흉중에는 원래 수만 갑병이 들어 있다.〔毋以延州爲意 小范老子胸中 自有數萬甲兵〕”라고 하였고, 사마광(司馬光)이 재상이 되자 요인(遼人)이 그 변방의 관리들을 단속하며 말하기를 “중국이 사마씨(司馬氏)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절대로 일을 내어 변방에 흔단(釁端)을 일으키지 말라.”라고 하였으니, 강약이 과연 병사(兵事)를 좋아하고 무예를 중시하는 데에 있겠습니까. 단지 적임자를 얻는 데에 있을 뿐입니다.

아, 문(文)을 숭상하면 강해지기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강해지고, 흥성하기를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흥성합니다. 반면에 무(武)를 숭상하면 강해지기를 구하여도 오히려 약해지고, 흥성하기를 구하여도 오히려 멸망합니다. 그러므로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범수(范睢)를 등용하여 무(武)를 숭상하며 강성해졌지만 끝내는 여불위(呂不韋)의 화가 있었고, 그 아들 효문왕(孝文王)과 그 손자 장양왕(莊襄王)도 모두 제대로 죽지 못한 채 백예(柏翳)의 후사(後嗣)가 끊어졌습니다.

시황(始皇)이 무(武)를 숭상하여 비록 천하를 얻긴 하였으나 곧바로 잃었고, 오대(五代)가 무를 숭상하였으나 거의 모두 발 돌릴 사이도 없이 망하였습니다.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은 호복(胡服)을 처음 착용하고 기사(騎射)의 법을 도입하였으니 무를 숭상한 것이 지극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결국에는 아들의 화를 초래하여 포위된 궁중에서 굶어 죽는 등 인륜의 변고가 참혹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무를 숭상하는 것은 실로 국가를 강하게 하는 바람직한 계책이 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대개는 또한 바로 화를 부르는 기막힌 계기가 된다고도 할 것입니다. 따라서 문(文)을 숭상하지 않고 무(武)를 숭상하는 것은 참으로 맹자(孟子)가 “위태로움을 편안히 여기고 재앙을 이롭게 여겨 망하게 되는 것을 좋아한다.〔安其危而利其菑 樂其所以亡者〕”라고 말한 것에 해당합니다. 성인(聖人)이 문(文)을 말하고 무(武)를 말하지 않은 것과, 선왕(先王)이 덕(德)을 밝히고 병사(兵事)를 살피지 않은 것이, 어찌 이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옛날 계해년(1623, 인조1) 연간에 신이 적소(謫所)에서 경사(京師)로 돌아올 적에, 병마(兵馬)가 대로(大路)에 교차해서 치달리는 것을 보고는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생각하기를 ‘성상께서 이미 난리를 평정하여 질서를 회복하셨으니, 이 뒤로 힘쓸 것은 오직 인정(仁政)을 행하고 문덕(文德)을 펼치는 데에 있는데, 이것이 어떻게 된 현상인가. 고어(古語)에 이르기를 「국용은 군중(軍中)에 들이지 않고, 군용은 국도(國都)에 들이지 않는다.〔國容不入軍 軍容不入國〕」라고 하였으니, 이는 바로 상서롭지 못한 조짐이다. 의거를 일으킨 제공(諸公)이 모두 이 도리를 알지 못하니, 만약 이런 일이 계속되면 난리가 종식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서(李曙)는 바로 신에게 인척(姻戚)의 어른이 됩니다. 그가 이괄(李适)을 보낼 적에 신이 극력 말하기를 “아무 까닭 없이 변방에 병력을 집결시키는 것은 대단히 안 될 일이다.”라고 하였으나, 이서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년도 채 되지 않아서 과연 큰 변란을 초래하여 하마터면 종사(宗社)가 망할 뻔하였습니다. 또 정묘년(1627, 인조5)과 병자년(1636)의 변란이 잇따라 일어났는데, 이것도 모두 군용(軍容)이 국도(國都)에 들어온 징험이라고 할 것입니다. 만약 식자에게 논하게 한다면, 신의 말이 또한 들어맞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와서는 또 그때보다 더욱 심한 점이 있습니다. 안에서는 궐내(闕內)에서 화포(火炮)를 연습하고 종가(鐘街)에서 검술을 연습하며, 밖에서는 영장(營將)이 각각 중병(重兵)을 장악하고 항상 군졸들에게 아침저녁으로 명령을 하달하니, 이는 무엇 때문입니까. 오기(吳起)가 말하기를 “임금님이 덕을 닦지 않으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전하께서 만약 덕을 제대로 닦으신다면 이런 일을 할 필요도 없을 것이요, 만약 덕을 닦지 않으신다면 적국의 사람이 여기에 있지 않을지 또 어떻게 알겠습니까.

금년 초봄에 장흥(長興) 사람이 와서 장차 합조(合操 군사 합동훈련)의 거조(擧措)가 있으리라고 말하기에, 신이 어디에서 합조하느냐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그것은 모르겠고, 장관(將官)이 모두 위구(危懼)하는 마음을 품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기전(畿甸)에서 와서 장차 소초(素草)의 들판에서 합조하는 거조가 있으리라고 말하기에, 신이 어디에서 들었느냐고 물었더니, 장성(長成)에 도착해서 군졸에게 들었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처음에는 놀라다가 나중에는 웃으면서 와언(訛言)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그 뒤에 또 들으니 영하(營下)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말하고 군졸들도 모두 알고 있기에 비로소 와언이 아닌 줄을 알았습니다.

아, 처음에 그런 말이 있게 된 것이 전하의 뜻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제장(諸將)의 의논에서 나온 것입니까. 마침내 그 일이 없게 된 것은 전하께서 저지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제장 자신이 그만둔 것입니까. 아, 천리(千里)에 군대를 동원하는 일을 어찌 아무 까닭 없이 해서야 되겠습니까. 조만간에 혹 이런 거조가 있게 된다면, 민폐를 끼치게 되는 것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이처럼 만백성 모두가 원망하며 이반(離叛)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흉흉하게 난리가 일어날 것을 생각하는 때에, 혹시라도 한 사나이가 군중(軍中)에서 크게 부르짖는다면, 그 누가 따르지 않을 것이며 그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또한 위태롭지 않겠습니까.

아, 공자(孔子)가 “문(文)과 관계된 일을 할 때에도 반드시 무(武)의 대비가 있어야 한다.”라고 한 것은 대개 문을 위주로 하고 무를 보조로 삼아야 한다는 뜻에서 발언한 것입니다. 또 “제사 지내는 법에 대해서는 들은 적이 있지만, 군대에 관한 일은 배우지 않았다.〔俎豆之事 則嘗聞之矣 軍旅之事 未之學也〕”라고 한 것은 대개 문(文)의 덕을 베풀면 무(武)를 일삼을 것이 없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인(聖人)의 지언(至言)이요 만고(萬古)의 상리(常理)인데, 모르는 자들은 필시 옛날에나 해당되지 지금은 해당이 안 된다고 생각할 것이요, 또 필시 우원(迂遠)해서 현실 사정에 소활(疏闊)하다고 비판할 것입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현재 당면한 급선무로 이보다 더한 것은 없다고 여겨집니다.

두보(杜甫)의 시에 “청금 입은 유생들은 진흙탕에서 곤욕을 당하고, 백마 탄 장군은 우레처럼 기세가 등등하네.〔靑衿胄子困泥塗 白馬將軍若雷電〕”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무를 숭상하고 문을 숭상하지 않음을 안타까워한 것입니다. 또 “어찌 꼭 삼천의 무리가 있어야만, 병마(兵馬)의 기운을 제압할 수 있으리오.〔何必三千徒 始壓戎馬氣〕”라고 하였는데, 이는 대개 문(文)을 숭상하면 문(文)이 비록 적더라도 무(武)를 이겨서 난리가 저절로 종식될 수 있음을 말한 것입니다. 이 시는 모두 〈국풍(國風)〉의 시체(詩體)이니, 실로 시인의 한가한 언어로만 간주하면 안 될 것입니다. 이로써 살펴보건대, 두보 역시 성인(聖人)의 뜻을 얻었으니, 그가 내심으로 직(稷)과 설(契)에 견준 것도 괴이할 것이 없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온 나라가 황황(遑遑)하게 오직 융정(戎政)을 급선무로 삼아, 무부(武夫)가 제멋대로 교만을 부리고 유생(儒生)이 수화(水火) 중에 빠져든 것이, 단지 우레처럼 기세등등하고 진흙탕에서 곤욕을 당하는 정도일 뿐만이 아니니, 어찌 탄식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삼가 원하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이처럼 천문(天文)이 경계의 뜻을 보여 주어, 두려워하며 겁을 내고 자신을 반성하며 닦아야 할 때를 당하여, 역시 이에 대해 다시 유념하시어, 무(武)를 위로 하고 문(文)을 아래로 하지 마소서. 그리하여 양(陽)을 붙들어 일으키고 음(陰)을 억눌러 제어하면, 음의 사특한 기운이 양을 해치는 것을 해소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 맹자(孟子)가 이르기를 “천하에 위엄을 보이되 무기나 갑옷의 유리함으로 하지 않는다.〔威天下不以兵革之利〕”라고 하였고, 또 “왕께서 만약 어진 정치를 백성에게 베풀어, 현재의 형벌을 줄여 주고 세금 거두는 것을 적게 해 주신다면, 백성들이 힘이 생겨서 논도 깊이 갈고 김도 잘 매어 수확이 많아질 것이요, 젊은 사람은 여가의 날에 효제충신의 도리를 닦아, 집에 들어가서는 부형을 잘 섬기고 밖에 나가서는 어른을 잘 섬길 것이니, 그들로 하여금 몽둥이를 만들어 진나라와 초나라의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칼날을 두들겨 패게 할 수 있을 것이다.〔王如施仁政於民 省刑罰 薄稅斂 深耕易耨 壯者以暇日修其孝悌忠信 入以事其父兄 出以事其長上 可使制挺以撻秦楚之堅甲利兵矣〕”라고 하였는데, 이 말이 참으로 음미할 만합니다. 그러고 보면 인정(仁政)이야말로 나라를 강하게 하는 근본이요 군기(軍器)는 단지 말단일 뿐인데, 어째서 꼭 민폐를 돌아보지 않고서 날마다 이 일에 종사한단 말입니까.

시험 삼아 한 경내(境內)의 일을 가지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군기(軍器)에 쓸 것으로 1년에 백성에게 거두는 것이, 탄(炭)이 몇천 섬(石)이고 정철(正鐵 시우쇠)이 1800여 근(斤)인데, 이를 목면(木綿)으로 계산하면 1근(斤) 당 1필(匹)에 해당합니다. 또 조총(鳥銃)의 값이 1, 2년 안쪽에 실제로 오승(五升) 35, 6자(尺) 목면으로 66동(同)인데, 이를 상목(常木)으로 계산하면 132동이 된다고 합니다. 이것은 바로 요부(徭賦 요역과 부세)에 응한 부로(父老)가 기록해 둔 것입니다. 그 사이에 소비하고 망실(亡失)하는 일이 있어도, 민간에서 공출(供出)하는 것이 그러한데, 만약 군기(軍器)의 역(役)이 있지 않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

이 현(縣)은 민결(民結)이 5백여 부(夫)에 불과한데도 거두는 것이 그만 이 정도까지 되니, 팔로(八路)를 전부 합하면 응당 몇천만억이 될 것입니다. 단지 1년에 거두는 것만 계산해도 벌써 이와 같으니, 매년 거두는 것을 통틀어 계산하면 또 얼마나 되겠습니까.

군기(軍器)를 월과(月課)하는 것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갑술년(1634, 인조12) 연간에 신이 성산(星山)의 수령으로 있을 때에도 이 일을 행하였으니, 그 이전은 계산에 넣지 않고 단지 갑술년부터 계산한다 하더라도 벌써 23년이나 되었습니다. 그 이전의 군기도 원래 많지 않은 것이 아닐 터인데, 여기에 또 23년 동안 조치한 것이 있으니, 그 숫자가 얼마나 많겠습니까.

신의 어리석은 소견으로는 월과와 자비(自備)를 정파(停罷)하고, 단지 옛날의 군기 가운데 견고하고 예리하여 쓸 만한 것들을 모두 보수하게 하였으면 합니다. 그리고 보수할 적에는 민간에서 절대로 수봉(收捧)하지 말게 하고, 단지 관청에서 그 일을 하도록 엄하게 과조(科條)를 세우면, 군기도 본디 이루 다 쓸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백성이 혜택을 받는 것도 이루 말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갑술년(1634)에 신이 성산(星山)을 맡아 월과(月課)로 군기를 제조할 때에는 신만 민력을 쓰지 않은 것이 아니라, 열읍(列邑)이 필시 똑같았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월과와 자비 모두 민력에서 나온다고 하는데, 조가(朝家)에서 이런 일을 어떻게 다 알 수 있겠습니까.

아, 이 하나의 일은 그 이해관계가 명약관화하니, 성명(聖明)께서 묘당(廟堂)의 의논을 기다릴 것 없이 한번 보시고 결단을 내리면 될 것입니다. 또 문(文)을 숭상하고 무(武)를 숭상하지 않는 한 조목도, 만약 전하께서 각오하신다면, 당초에 이를 주장한 자를 제외하고 그 누가 일식과 월식처럼 우러러보지 않겠습니까. 이 또한 행하기가 매우 쉬울 것입니다.

다만 인재를 가려 뽑는 한 조목만은 사람들이 필시 신의 정직한 말을 모두 싫어할 것입니다. 그러나 조정에 있는 신하들이 만약 인재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를 알고, 자로(子路)가 잘못을 듣고서 좋아했던 것처럼 할 수 있다면, 그들도 신의 발언이 지극히 공정한 것에 심복(心服)할 것입니다.

신이 임진년(1652, 효종3)에 서울에 있을 때, 민응형(閔應亨)을 재차 만났습니다. 신이 민응형과는 평소 왕래하는 정분이 없는데도 민응형이 신을 보고는 바로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게 대하면서, 잘못된 시속을 안타깝게 여기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러고는 말하기를 “주상(主上)이 성명(聖明)하시어 선한 일이라면 모두 행하실 수가 있는데, 우리들이 변변치 못한 탓으로 제대로 보도(輔導)하지 못하고 있다.”라고 하였는데, 입으로만 그렇게 표현한 것 같지 않게 감탄하여 마지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덕을 숭상하며 사심(私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하겠습니다. 백관(百官)이 멀리 자로(子路)를 본받을 필요 없이 가까이 민응형을 취하여 법도로 삼고 서로 본받는다면, 신이 군부(君父)를 위해 감히 숨기지 않고 발언한 것을 반드시 싫어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심담(心膽)과 폐장(肺腸)이 완전히 변하여 자기의 잘못을 고집하는 일이 없게 될 것이니, 전하께서 인재를 가려 뽑는 일이 어려울 것이 또 뭐가 있겠습니까.

신은 전하에게 깊이 기대하는 것이 있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 있는 군자(君子)들에게도 깊이 기대하는 것이 있습니다. 신이 삼가 생각건대, 전하께서는 사정없이 벌을 내리는 하늘을 쳐다보시며, 위망(危亡)이 박두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시어, 소의간식(宵衣旰食)하며 음식 드는 것도 잊고 허리띠도 풀지 않고 계실 것입니다. 임금님이 걱정하는 것이 이와 같다면, 신하로서는 응당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래서 신이 종일토록 아뢸 내용을 구상하고 새벽까지 붓을 잡고 작성하면서, 사정이 절박하고 의리가 격동하여 발언을 절제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위축되어 떨리는 심정을 금하지 못하면서도, 하늘의 태양을 우러러 바라보며 간절히 기원하는 지극한 심정을 가누지 못한 채, 삼가 죽음을 무릅쓰고 아룁니다.


답하기를 “소(疏)를 보고 모두 잘 알았다. 승지(承旨)가 나를 사랑하는 정성이 초야(草野)에 있으면서도 차이가 나지 않아, 전에도 이미 말해 주기를 그치지 않았고 지금도 다시 말해 주기를 부지런히 하여 그치지 않으니, 참으로 임금을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자라고 이를 만하다. 재삼 열람하며 깊이 감탄하였다. 진달한 일들을 어찌 체념(體念)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주-D001] 위언(危言) : 올바른 말, 즉 굽히지 않고 소신 있게 발언하는 강직한 언론을 말한다. 《논어》 〈헌문(憲問)〉에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말과 행동 모두 바르게 해야 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행동은 바르게 하고 말은 겸손하게 해야 한다.〔邦有道 危言危行 邦無道 危行言孫〕”라는 말이 나온다.[주-D002] 좋아하기만 …… 경계 : 《논어》 〈자한(子罕)〉에 “바른 소리로 일러 주는 말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뒤에 잘못을 고치는 것이 귀중하다. 완곡하게 이끌어 주는 말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뒤에 그 말을 추슬러 보는 것이 귀중하다. 좋아하기만 하고 추슬러 보지 않거나 따르기만 하고 잘못을 고치지 않는다면 나도 그런 사람은 어떻게 할 도리가 없다.〔法語之言 能無從乎 改之爲貴 巽與之言 能無說乎 繹之爲貴 說而不繹 從而不改 吾末如之何也已矣〕”라는 공자(孔子)의 말이 나온다.[주-D003] 명주(明主)가 …… 갔고 : 춘추 시대 송(宋)나라의 분야(分野)에 재앙의 별인 형혹성(熒惑星)이 나타나자 임금인 경공(景公)이 근심하였다. 이에 사성(司星) 자위(子韋)가 재상이나 백성이나 해〔歲〕에 그 재앙을 떠넘길 수 있다고 하였는데, 경공이 “재상은 나의 고굉이다.〔相吾之股肱〕”라고 하고, “임금은 백성이 있어야 한다.〔君者待民〕”라고 하고, “해가 흉년이 들면 백성이 곤궁해진다.〔歲饑民困〕”라고 하자, 자위가 “임금께서 임금다운 말씀을 세 번이나 하셨으니, 형혹성도 응당 감동할 것입니다.〔君有君人之言三 熒惑宜有動〕”라고 하였다. 그러고는 천문을 관측해 보니 “과연 형혹성이 삼도를 옮겨 갔다.〔果徙三度〕”라는 기록이 전한다. 《史記 卷38 宋微子世家》 일도(一度)라고 한 것은 고산의 착오가 아닌가 한다.[주-D004] 현상(賢相)의 …… 바뀌었으니 : 선마(宣麻)는 흰 마지(麻紙)에 써서 선포한 조서(詔書)라는 뜻으로, 보통 재상 임명장을 가리킨다. 송(宋)나라 휘종(徽宗) 대관(大觀) 4년(1110) 6월에 장천각(張天覺)이 정승에 임명되었는데, 이날 저녁에 혜성(彗星)이 없어지고 오래 가물다가 비가 내렸다고 한다. 이 내용은 송(宋)나라 당경(唐庚)이 지은 〈내전행(內前行)〉이라는 부(賦)의 서문에 나오는데, 이 작품은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에 실려 있다. 그중에 “들소 꼬리 모양의 혜성이 어젯밤에 창문을 환히 비추더니, 오늘 밤엔 칼끝 같은 그 빛이 몽당 빗자루처럼 되었네. 이튿날 아침에 변하여 단비가 내리니, 관가는 훌륭한 재상 얻음을 기뻐한다오.〔旄頭昨夜光照牖 是夕鋒芒如禿箒 明朝化作甘雨來 官家喜得調元手〕”라는 표현이 보인다.[주-D005] 하늘의 …… 것이다 :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나온다.[주-D006] 망가진 …… 같았는데 : 너무도 감격스러워서 몸 둘 바를 몰랐다는 말이다. 한유(韓愈)의 “군자의 덕을 고맙게 생각하며, 망가진 수레에 탄 것만 같았다오.〔感荷君子德 怳若乘朽棧〕”라는 시구에서 나온 말이다. 《韓昌黎集 卷5 贈張籍》[주-D007] 하우(夏禹)가 …… 하지만 : 《서경》 〈고요모(皐陶謨)〉에 “우가 고요의 좋은 말을 듣고는 절하며 옳다고 하였다.〔禹拜昌言曰兪〕”라는 말이 나오고,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우는 좋은 말을 들으면 절했다.〔禹聞善言則拜〕”라는 말이 나온다.[주-D008] 방계(防啓) : 상주(上奏)된 안건에 대하여 담당 관원이 그 일의 부당함을 아뢰어 반대하는 것을 말한다.[주-D009] 전하께서 …… 같다 : 혹 본의 아닌 실수가 있어도 좋은 쪽으로 해석하여 일이 잘되게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인데, 비국(備局)이 그렇게 할 리가 없다는 뜻으로 고산이 비유한 말이다. 초(楚)나라 영(郢)에 사는 사람이 연(燕)나라 상국(相國)에게 밤에 편지를 쓸 적에, 불이 밝지 않자 “촛불을 들어라.〔擧燭〕”라고 명령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거촉(擧燭)’이라는 두 글자를 편지 속에 잘못 기입하였다. 그런데 연나라 상국이 그 편지를 받고서 “거촉은 밝음을 숭상하는 것인데, 밝음을 숭상하려면 현인을 발탁하여 등용해야 한다.〔擧燭者 尙明也 尙明也者 擧賢而任之〕”라고 생각하고는, 왕에게 건의한 결과 나라가 잘 다스려졌다는 영서연설(郢書燕說)의 이야기가 전한다. 《韓非子 外儲說左上》[주-D010] 삼걸(三傑) : 장량(張良)과 한신(韓信)과 소하(蕭何)를 가리킨다. 한 고조가 천하를 통일한 뒤에 이들을 일컬어 “이 세 사람은 모두가 인걸이다.〔此三者 皆人傑也〕”라고 말한 고사가 있다. 《史記 卷3 高祖本紀》[주-D011] 누경(婁敬)이 …… 하였습니다 : 한 고조(漢高祖) 5년(기원전 202)에 신하들 대부분이 산동(山東) 출신이라서 자기들의 고향과 가까운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정하게 하고 싶었지만, 누경이 산동의 불리함과 천부지국(天府之國)인 진(秦)나라 땅의 이로움을 거론하면서 장안(長安)을 도읍지로 정하도록 건의하자 고조가 신하들에게 의견을 물었는데, 장량이 누경의 의견에 동조하자 즉일로 서쪽 장안에 도읍을 정하고는 누경에게 유씨(劉氏) 성을 하사하며 봉춘군(奉春君)에 봉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99 劉敬列傳》[주-D012] 지혜로운 …… 있다 : 《사기(史記)》 권92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지혜로운 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잘못이 있고, 어리석은 자도 천 가지 생각 중에 반드시 하나의 옳음이 있다. 그러므로 광부의 말이라도 성인은 채택한다고 하는 것이다.〔智者千慮 必有一失 愚者千慮 必有一得 故曰狂夫之言 聖人擇焉〕”라는 말이 나온다.[주-D013] 송(宋)나라 …… 일컬었는데 : 송 태조(宋太祖) 조광윤(趙匡胤)이 서경(西京)에 행차하였을 때에 장제현(張齊賢)이 포의(布衣)의 신분으로 열 가지 계책을 바치자, 태조가 소견(召見)하여 물어보니 장제현이 손으로 땅에 그으며 조목별로 진달하였는데, 태조가 그중에 네 가지 계책이 좋다고 하였다. 그러자 장제현이 나머지도 모두 좋다고 고집부리다가 위사(衛士)에게 끌려 나갔다. 그 뒤 태조가 돌아와서 그의 아우인 태종(太宗)에게 “내가 서경에 가서 오직 장제현 한 사람을 얻었는데, 나는 그에게 관작을 맡기지 않을 것이니, 네가 나중에 그를 거두어 보좌하도록 하라.〔我幸西京 惟得一張齊賢 我不欲遂官爵之 汝異時可收以自輔也〕”라고 당부한 고사가 전한다. 《續資治通鑑長編 卷18 太宗》[주-D014] 불원복(不遠復) : 멀리 가지 않고 되돌아온다는 뜻으로, 잘못을 깨닫고서 금세 바른길로 들어서는 것을 말한다. 《주역》 〈복괘(復卦) 초구(初九)〉에 “멀지 않아서 되돌아오니,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요, 크게 좋을 것이다.〔不遠復 无祗悔 元吉〕”라는 말이 나온다.[주-D015] 나막신 …… 못하였습니다 : 매우 기쁜 마음을 비유하는 말이다. 동진(東晉)의 사안(謝安)이 바둑을 두고 있을 때, 그의 조카 사현(謝玄)이 부견(苻堅)의 군대를 격파했다는 보고를 접하고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고 그대로 바둑을 둔 뒤에, 내실로 돌아와서 문지방을 넘다가 너무 기쁜 나머지 “나막신 굽이 부러지는 것도 몰랐다.〔不覺屐齒之折〕”라는 기록이 《진서(晉書)》 권79 〈사안열전(謝安列傳)〉에 보인다.[주-D016] 지금은 …… 보면 : 대본에는 ‘今加二倍有餘’로 되어 있으나, ‘二’는 문맥상 ‘三’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17] 나와 …… 태수(太守)들이다 : 한(漢)나라 선제(宣帝)가 항상 “서민이 전원에서 편안히 살며 탄식하고 원망하는 마음이 없게 하려면 정치가 공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져야 하는데, 나와 함께 이 일을 할 자는 바로 연봉 이천석의 우수한 태수들이다.〔庶民所以安其田里 而亡歎息愁恨之心者 政平訟理也 與我共此者 其惟良二千石乎〕”라고 말했다는 기록이 《한서(漢書)》 권89 〈순리전(循吏傳)〉에 나온다.[주-D018] 백성들은 …… 것이니 : 《서경》 〈무일(無逸)〉에 “백성들이 안 될 일이다 싶으면 마음속으로 반대하며 원망할 것이요, 안 될 일이다 싶으면 그 입으로 저주를 퍼부을 것이다.〔民否則厥心違怨 否則厥口詛呪〕”라는 말과 “이 모든 원망이 임금의 한 몸에 집중될 것이다.〔是叢于厥身〕”라는 말이 나온다.[주-D019] 계학(谿壑) : 산속의 골짜기라는 뜻으로, 탐욕을 비유하는 말로 흔히 쓰인다. 《남제서(南齊書)》 권25 〈원숭조열전(垣崇祖列傳)〉에 “빈번히 발탁되어 올라가면서도, 계학처럼 만족할 줄을 알지 못하였다.〔頻煩升擢 谿壑靡厭〕”라는 말이 나온다.[주-D020] 미려(尾閭) : 바닷물이 쉴 새 없이 빠져나간다는 동해 밑바닥의 골짜기 이름인데, 역시 끝없는 탐욕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옥초(沃燋)라고도 한다.[주-D021] 나의 …… 때문이다 : 소식(蘇軾)의 시에 “담장 뚫는 소인배에게 쓸 것이 있으리오, 보기만 해도 허리와 목이 서늘할 텐데 뭘. 나의 칼이 너의 죄를 묻지 않아도, 부끄러운 생각이 벌써 심간(心肝)에 있으리라.〔胡爲穿窬輩 見之要領寒 吾刀不汝問 有媿在其肝〕”라는 말이 나온다. 《蘇東坡詩集 卷18 以雙刀遺子由子由有詩次其韻》[주-D022] 여수(女嬃)가 두들긴 다듬잇돌 : 세상에서 구하기 어려운 보물을 비유하는 말이다. 여수는 굴원(屈原)의 누이 이름인데, 여수(女須)라고도 한다. 북위(北魏) 역도원(酈道元)이 지은 《수경주(水經注)》 권34 〈강수(江水)2〉에, 진(晉)나라 원산송(袁山松)의 말을 인용하여 “자귀현(秭歸縣) 북쪽 160리 지점에 굴원의 고택이 있다.……그 고택에서 동북쪽으로 60리 지점에 여수의 사당이 있는데, 그녀가 썼던 다듬잇돌이 아직도 있다.〔縣北一百六十里有屈原故宅……宅之東北六十里有女嬃廟 擣衣石猶存〕”라고 하였다. 대본에는 ‘數擣之砧’으로 되어 있으나, ‘數’는 ‘嬃’의 잘못이기에 바로잡아 번역하였다.[주-D023] 차구(借寇) : 구순(寇恂)을 빌린다는 뜻으로, 선정을 베푼 수령을 다시 그 고을에 임명해 달라고 청하는 것을 말한다. 후한 광무제(後漢光武帝) 때 구순이 하내(河內)ㆍ영천(潁川)ㆍ여남(汝南)의 태수(太守)를 연임하며 선정을 베풀다가 여남 태수를 그만두고 조정에 들어와서 집금오(執金吾)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광무제를 따라 영천에 가서 도적의 항복을 받을 적에 고을 사람들이 길을 막고 “구순을 1년 동안 빌려 달라.〔借寇君一年〕”라고 간청하자 그곳에 머물면서 백성들을 위로하게 한 고사가 전한다. 《後漢書 卷16 寇恂列傳》[주-D024] 공정하면 …… 어두워진다 : 《순자(荀子)》 〈불구(不苟)〉에 나오는 말인데, 옛날 중국 외방의 관청 정면에 ‘공생명(公生明)’이라는 세 글자를 돌에 새겨 세워서 관원들을 경계시켰다고 한다.[주-D025] 지혜 …… 말 : 《서경》 〈소고(召誥)〉에 “은(殷)나라가 종말을 고할 즈음에 지혜 있는 자는 숨어 버리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자만 벼슬자리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처자(妻子)를 안아 붙잡고는 애통한 심정을 하늘에 호소하였다.〔厥終 智藏癏在 夫知保抱攜持厥婦子 以哀籲天〕”라는 말이 나온다.[주-D026] 제 위왕(齊威王)은 …… 말하였으며 : 전국 시대 양 혜왕(梁惠王)이 제 위왕(齊威王)과 평륙(平陸)에서 회합했을 적에 “우리나라가 작기는 하지만 그래도 직경 한 치 되는 구슬로 12채의 수레를 앞뒤로 비출 수 있는 구슬이 10개나 된다.〔若寡人國小也 尙有徑寸之珠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라고 자랑하자, 위왕이 “내가 보배로 삼는 것은 왕과 다르다.〔寡人之所以爲寶與王異〕”라고 하고는, 단자(檀子)와 반자(肦子)와 검부(黔夫)와 종수(種首) 등 네 명의 신하를 차례로 거론하며 “장차 이들로 천리를 비출 것이니, 어찌 다만 12채의 수레에 그치겠는가.〔將以照千里 豈特十二乘哉〕”라고 하니, 양 혜왕이 풀이 죽어서 떠나갔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주-D027] 참으로 …… 소원이다 : 연 소왕(燕昭王)이 천하의 인재를 불러 모으려 하면서 곽외(郭隗)에게 한 말인데, 《사기(史記)》 권34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나온다. 이때 곽외가 “왕께서 반드시 인재를 초빙하려면, 나부터 먼저 예우하시라. 그러면 나보다 훌륭한 자가 어찌 천리를 멀다고 여기겠는가.〔王必欲致士 先從隗始 況賢於隗者 豈遠千里哉〕”라고 하자, 소왕이 그를 위해 황금대(黃金臺)를 세우고 사사(師事)하였다. 소왕은 연왕(燕王) 쾌(噲)의 태자로, 제(齊)나라가 연나라의 분란을 틈타 침입한 것을 한스럽게 여겨, 악의(樂毅) 등 많은 인재들을 모아 백성과 동고동락하며 나라를 부강하게 한 결과, 즉위 28년 만에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를 함락하여 복수하였다.[주-D028] 위왕(威王)은 …… 파악하였는데 : 제(齊)나라 위왕이 즉위한 지 9년이 되도록 나라가 잘 다스려지지 않자, 즉묵(卽墨)과 아(阿) 지방에 사신을 보내 그 정사를 살펴보게 하고는 두 지방을 다스리는 대부를 부른 뒤에, 비방하는 말이 날마다 들린 즉묵 대부(卽墨大夫)에게는 임금의 측근에게 아부를 하지 않고 정치를 잘했다면서 만가(萬家)의 식읍(食邑)을 봉해 주고, 칭찬하는 말이 날마다 들린 아 대부(阿大夫)에게는 임금의 측근에게 아부만 하면서 정치를 잘 못했다면서 그를 칭찬한 사람들과 함께 삶아 죽였는데, 그 뒤로 제나라가 크게 다스려졌다는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46 田敬仲完世家》[주-D029] 강강(剛强)하면 …… 아닐세 : 송(宋)나라 증공(曾鞏)의 〈우미인초행(虞美人草行)〉에 나온다. 《고문진보(古文眞寶)》 전집(前集) 권5에 실려 있다. 저자에 대해서는 송(宋)나라 위 부인(魏夫人) 즉 증자선(曾子宣)의 부인 위씨(魏氏)라는 설도 있다.[주-D030] 범중엄(范仲淹)이 …… 하였고 : 송(宋)나라 범중엄이 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로 있다가 섬서 경략사(陝西經略使)로 나가서 수년 동안 변방을 지킬 적에, 강족(羌族)은 그를 존경하여 용도노자(龍圖老子)라고 부르고 서하인(西夏人)은 소범노자(小范老子)라고 부르면서 “그의 흉중에 수만 갑병(甲兵)이 들어 있다.”라고 두려워하며 감히 침범을 하지 못했다는 일화가 전한다.[주-D031] 사마광(司馬光)이 …… 하였으니 : 요(遼)와 하(夏)에서 사신이 오면 반드시 사마광의 기거(起居)를 물어보았으며, 그 변방의 관리들을 단속하며 “중국이 사마씨를 재상으로 삼았으니, 경솔하게 일을 내어 변방에 흔단을 만들지 말라.〔中國相司馬矣 毋輕生事開邊隙〕”라고 경계했다는 내용이 《송사(宋史)》 권336 〈사마광열전(司馬光列傳)〉에 나온다.[주-D032] 백예(柏翳) : 진(秦)나라의 시조(始祖)이다. 순(舜) 때의 사람으로, 본래는 대비(大費)라고 칭하였다. 백익(伯益)이라고도 한다. 우(禹)와 함께 치수(治水)의 공을 세웠으며, 순을 도와 새와 짐승을 길들였는데, 순이 그에게 영씨(嬴氏)의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史記 卷5 秦本紀》[주-D033] 조(趙)나라 …… 참혹하였습니다 : 전국 시대 조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서방과 북방 민족의 복식(服飾)을 채용하고, 백성들에게 기사(騎射)의 법을 익히게 하였는데, 이를 역사적으로 무령왕의 호복기사(胡服騎射)라고 칭한다. 또 무령왕이 처음에 맏아들 장(章)을 태자로 세웠다가 폐하고 혜후(惠后)의 소생인 하(何)를 태자로 세운 뒤에 선위(禪位)하니, 이 사람이 혜문왕(惠文王)이다. 이에 장이 반란을 일으켜 혜문왕을 죽이려다가 무령왕의 숙부인 공자(公子) 성(成)에게 패하여 부친이 있는 사구(沙丘)의 궁궐로 피신하였는데, 공자 성이 장을 죽이고는 무령왕을 석 달 동안 포위한 끝에 궁중에서 굶어 죽게 하였다. 《史記 卷43 趙世家》[주-D034] 위태로움을 …… 좋아한다 : 《맹자》 〈이루 상(離婁上)〉에 나온다.[주-D035] 국용(國容)은 …… 않는다 : 《사마법(司馬法)》 〈천자지의(天子之義)〉에 나온다. 국용은 국가의 예제(禮制)와 의절(儀節)을 말하고, 군용(軍容)은 군대의 예법과 무기ㆍ장비 등을 말한다. 대본에는 ‘國容不入於軍 軍容不入於國’으로 되어 있으나, 《사마법》 원문에 의거하여 ‘於’ 자를 삭제하였다.[주-D036] 오기(吳起)가 …… 하였습니다 : 전국 시대 위(魏)나라 무후(武侯)가 배를 타고 서하(西河)의 중류(中流)를 내려가다가 오기를 돌아보고는, 산천이 험고(險固)한 것이야말로 위나라의 보배라고 자랑하자, 오기가 “사람의 덕에 달려 있지, 산천의 험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임금님이 덕을 닦지 않으면 이 배 안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적국의 사람이 될 것이다.〔在德不在險 若君不修德 舟中之人盡爲敵國也〕”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史記 卷65 吳起列傳》[주-D037] 소초(素草) : 용인(龍仁) 남쪽의 객점 이름이다. 《고산유고》 권1 〈남쪽으로 돌아갈 때의 기행시〔南歸記行〕〉에 “소초는 객점의 이름이다.”라는 자주(自註)가 붙어 있다.[주-D038] 문(文)과 …… 한다 : 춘추 시대 노(魯)나라 정공(定公)이 제(齊)나라 경공(景公)과 협곡(夾谷)에서 회합할 적에 공자가 “신이 듣건대, 문(文)과 관계된 일을 할 때에도 반드시 무(武)의 대비가 있어야 하고, 무(武)와 관계된 일을 할 때에도 반드시 문(文)의 대비가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옛날에 제후가 국경 밖으로 나갈 적에는 반드시 관원을 갖춰 수행하게 하였으니, 청컨대 좌우 사마를 갖추도록 하소서.〔臣聞有文事者 必有武備 有武事者 必有文備 古者諸侯出疆 必具官以從 請具左右司馬〕”라고 하여 정공이 그대로 따른 고사가 전한다. 이 협곡의 회합은 원래 제나라가 노나라를 얕보고서 망신을 주려고 주선한 것이었으나, 이처럼 공자가 미리 무위(武威)를 갖추고 기지(機智)를 발휘한 결과, 제나라가 오히려 낭패를 당하여 점령하고 있던 노나라 땅을 돌려주며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孔子家語 相魯》 《春秋左氏傳 定公10年》[주-D039] 제사 …… 않았다 : 위(魏)나라 영공(靈公)이 공자(孔子)에게 진법(陣法)을 묻자, 공자가 이렇게 대답하고는 다음 날 바로 떠나갔다는 말이 《논어》 〈위령공(衛靈公)〉 앞부분에 나온다.[주-D040] 청금(靑衿) …… 등등하네 : 《두소릉시집(杜少陵詩集)》 권18 〈절함행(折檻行)〉에 나온다. 이 시는 어조은(魚朝恩) 등 무인(武人)이 횡행하는데도 조정에 직간하는 신하가 없는 것을 개탄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주-D041] 어찌 …… 있으리오 : 두보(杜甫)가 형주(衡州)로 가던 도중에 형산현(衡山縣) 문묘(文廟)에 학당(學堂)이 새로 세워진 것을 보고 현령에게 지어 준 시 중에 나오는 구절이다. 삼천의 무리는 공자의 삼천 제자를 가리킨다. 《杜少陵詩集 卷23 題衡山縣文宣王廟新學堂呈陸宰》[주-D042] 두보 …… 것 : 두보가 장안(長安)에서 처자(妻子)가 있는 봉선현(奉先縣)으로 갈 때의 감회를 읊은 오언고시(五言古詩) 첫머리에 “두릉에 한 사람 포의가 있으니, 이자는 나이 들수록 세상 뜻이 졸렬한데, 자기를 허여하는 것은 어찌 그리도 어리석은지, 내심으로는 직과 설에 견준다네요.〔杜陵有布衣 老大意轉拙 許身一何愚 竊比稷與契〕”라는 말이 나온다. 직(稷)과 설(契)은 모두 순(舜) 임금 때의 현신(賢臣)들이다. 《杜少陵詩集 卷4 自京赴奉先縣詠懷五百字》[주-D043] 천하에 …… 않는다 : 《맹자》 〈공손추 하(公孫丑下)〉 첫 장에 보인다.[주-D044] 왕께서 …… 것이다 : 《맹자》 〈양혜왕 상(梁惠王上)〉 5장에 나온다.[주-D045] 월과(月課) : 매월 일정하게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주-D046] 자비(自備) : 각 고을이 스스로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주-D047] 일식과 월식 : 잘못을 알고 바로 고치는 군자의 자세를 비유한 말이다. 《논어》 〈자장(子張)〉의 “군자의 허물은 일식이나 월식과 같다. 허물이 있을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보게 되고, 허물을 고치면 사람들이 모두 우러러본다.〔君子之過也 如日月之食焉 過也人皆見之 更也人皆仰之〕”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주-D048] 자로(子路)가 …… 것 : “자로는 사람들이 그에게 잘못이 있다고 일러 주면 기뻐하였다.〔子路 人告之以有過則喜〕”라는 말이 《맹자》 〈공손추 상(公孫丑上)〉에 나온다.[주-D049] 소의간식(宵衣旰食) : 날이 새기 전에 일어나 옷을 입고 해가 진 뒤에야 늦게 저녁을 먹는다는 뜻으로, 임금이 나라를 걱정하며 정사에 부지런한 것을 말한다.




매천록 서문
설해목(법정)

Copyright 1999-2017 Zeroboard / skin by zer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