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려증동

이 말은 알 속의 병아리가 껍질을 뚫고 세상밖으로 나올려고 힘쓸 때에 어미 닭이 입부리로 꼭 쪼이면 병아리가 알 밖의 세상으로 소리를 지르며 나온다는 말입니다. 알 속의 병아리 처럼 학생들도 어둠 속 세계에서 밝고 넓은 세계로 나올려고 노력할 때 시기 적절하게 문리를 터 주는 스승의 혜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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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준호(2017-11-18 21:18:44, Hit : 145, Vote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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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 할 때가 있다 (논어 이야기)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hani.co.kr/arti/culture/r…

떠나는 이유에 대해 침묵해야 할 때가 있다

공자는 무엇에 대해 침묵했고, 무엇에 대해 이야기했나? <논어> 술이(述而) 편에 따르면, 공자가 침묵한 대표적인 사안은 괴이한 일, 거친 물리력을 쓰는 일, 어지러운 일, 신묘한 일이다.(子不語怪力亂神) 그리고 주지하다시피 공자가 주로 이야기 한 것은 인(仁), 예(禮), 배움(學) 등이다. 그러나 <논어> 자한(子罕) 편의 첫 문장을 읽은 독자는 당혹한다. “공자께서는 이익, 운명, 인에 대해서 드물게 말씀하셨다.”(子罕言利與命與仁) 공자가 인에 대해 드물게(罕) 이야기했다고? 그렇다면 <논어>에 106번이나 나온다는 인에 대한 언급, 그 수다스러운 논의는 다 무엇이란 말인가? 이 모순을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까?
텍스트에서 모순적인 언명이나 취지를 마주쳤을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까? 먼저 일견 모순처럼 보이는 것들이 사실은 모순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할 수 있다.
첫째, 모순이 되지 않게끔 문장 속 단어를 재정의하려고 시도할 수 있다. “공자께서는 이익, 운명, 인에 대해서 드물게 말씀하셨다”(子罕言利與命與仁)는 문장의 경우, 여(與)라는 글자를 병렬의 뜻을 가진 글자로 해석하지 않고 “찬성하다”라는 동사로 보아서 모순을 해결하는 방법이 있다. 그렇게 재해석할 경우, 그 문장은 “공자께서는 이익에 대해서는 드물게 말씀하셨지만, 운명과 인에 대해서는 찬성하셨다”가 된다. 중국 금(金)나라 학자 왕약허(王若虛)와 청나라 학자 사승조(史繩祖)와 같은 학자들은, 이와 유사한 방식을 취하여 위에서 말한 모순을 해결하고자 했다. 단어의 해석을 수정하려는 다른 시도로는 청나라 학자 황식삼(黃式三)의 해석을 들 수 있다. 그는 한(罕)을 “드물게”가 아니라 “공공연하게”로 해석한다. 즉 공자께서는 이익, 운명, 인에 대해서 공공연하게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둘째, 모순이 되지 않게끔 문장을 새로이 나누어 보려고 시도할 수 있다. 이를테면 중국 청나라 학자 초순(焦循)과 일본 도쿠가와 시대 사상가 오규 소라이(荻生?徠)는 앞 네 글자(子罕言利)와 뒤 네 글자(與命與仁)로 문장을 크게 대별했다. 그렇게 할 경우, “공자께서는 이익에 대해서 드물게 말씀하시되, (드물게나마 말씀하실 때는) 운명과 함께 (관련지어 말씀하시고) 인과 함께 (관련지어 말씀하셨다)”라고 해석된다.

‘드물게 말한 것’과 ‘드물게 기록한 것’의 차이?
이러한 두 가지 방법은 한자의 용례에 관한 지식을 동원해서 모순을 해결하고자 하는 사례들이다. 이러한 시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은 주어진 문장의 통상적인 뜻을 유지하면서, 모순을 해소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첫째, “드물게”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횟수를 의미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데루이 다카쿠니(照井全都)의 논어해(論語解)는 “(‘드물게’라는 말이 의미하는 것은) 완전히 입을 닫고 언급하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고, 늘 많이 이야기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非絶口而不言也, 不常多言耳)라고 말한다. 즉 <논어>에 인이 106번이나 언급되어도, 그것을 “드물게” 말했다고 간주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많고 적음의 정도는 상대적이다.
둘째, 중국의 학자 양백준(楊伯峻)처럼, 드물게 말했다는 것과 드물게 기록했다는 것의 차이에 주목할 수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상황을 상상해보라. 실제 공자는 인에 대해서 드물게 말했다. 그토록 중요한 사안에 대해 드물게 말씀하시다 보니 제자들은 자주 물을 수밖에 없었고, 그 대화의 결과들을 끌어모은 것이 <논어>인 까닭에 <논어>에는 인에 대한 기록이 상대적으로 많아졌다. 이러한 모순 해결책을 생각해내기 위해서는, 논어가 공자의 말씀을 단순히 받아 적은 것이 아니라 편집자의 주관이 강하게 개입된 저술이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가 대하는 텍스트들 중에서 편집자의 손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거의 없다.
이 ‘논어 에세이’도 예외가 아니다. <논어>의 경우도 편집자의 손길에 의해 다양한 이본(異本)이 탄생해왔다. 근래에도 제나라본 <논어>(齊本)가 발굴된 바 있고, 지금 이 순간에도 중국 어디에선가 달리 편집된 <논어>가 발굴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은 진짜 <논어>, 진짜 공자라는 논의를 무색하게 만든다. 우리가 아는 <논어>는 편집 과정을 통해 매개된 텍스트이다. 그렇다고 이것이 곧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논어> 판본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지속적으로 전승되고, 사람들에게 많이 읽혀온 텍스트는 진본(眞本) 여부와 무관하게, 그 자체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셋째, 다른 제자들은 인에 대해 여러 차례 들은 반면, 저 구절의 기록자만 적게 들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실로 <논어> 옹야(雍也) 편에서 공자는 사람에 따라 이야기해줄 수 있는 내용이 달라진다는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 “중인 이상은 높은 차원에 대해 이야기해줄 수 있고, 중인 이하는 높은 차원에 대해 이야기해 줄 수 없다.”(中人以上可以語上也 中人以下不可以語上也) 그렇다면 어떤 언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언명이 베풀어질 때 상정되었던 청중을 재구성할 필요가 있다. 마주한 제자가 누구냐에 따라 공자가 가르침을 달리 베풀었다는 점은 학자들에게 널리 인정되고 있다.
넷째, 시간의 변수를 도입해 볼 수 있다. 저 기록자가 저 언명을 할 때까지는 공자는 정말로 인에 대해 드물게 말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이후 어느 시점부터 공자는 열렬히 인에 대해 설파하기 시작했을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제한된 시간 내에 상호 충돌하는 언술을 한다면 그것을 모순이라고 할 수는 있어도,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상호 충돌하는 언술을 한다면, 그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 바뀌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어느 날 누군가 당신을 대머리라고 비웃고 나서, 곧이어 사람 외모를 가지고 놀려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순된 언명일 것이다. 그러나 1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 그가 사람 외모를 가지고 놀려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고 생각해보자. 이때 그는 모순되는 언명을 한다기보다는, 그 10년 동안 자신의 과거를 반성하고 새로운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이 경우 필요한 것은, 그 사람의 모순을 지적하는 일이 아니라 어떤 과정을 통해서 생각을 바꾸게 되었는가를 추적하는 생애사적 연구이다. 실제로 적지 않은 사상사 연구가 생애사의 형태를 띠고 있다.

퀜틴 스키너, “일관성 기대 자체가 강박관념”
지금까지의 논의들은 텍스트 내의 모순을 해소해야 한다는 강박을 전제한 것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텍스트 내의 모순을 꼭 해소할 필요가 있을까? 모순을 모순대로 인정하고, 그 모순의 함의를 따져볼 수도 있지 않을까?
첫째, 리오 스트라우스 학파의 독법을 따르는 이들은, 뛰어난 사상가가 해소하기 어려운 어처구니없는 모순을 저지를 때는 그 모순은 의도적인 것이며, 그런 모순에는 직접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비의적인 메시지가 담겨 있다고 해석할지도 모른다. 이를테면 직접적으로 진술하면 박해를 받을 가능성이 있는 위험한 통찰을 일부러 모순 어법을 통해 표현해 보는 것이다. 명민한 독자만이 자신이 숨긴 뜻을 알아볼 수 있도록.
둘째, 리오 스트라우스의 비판자인 퀜틴 스키너는 텍스트에 일관성이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자체가 일종의 강박관념이자 신화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mythology of coherence). 퀜틴 스키너의 취지는 독자들이 존재하지도 않는 일관성을 억지로 재구성하려는 데서 오는 왜곡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리라. 그러나 잠정적으로나마 일관성을 전제하지 않으면 텍스트를 아예 읽어내기 어려울 수도 있다. 대개의 경우 사상가는 자기 생각의 일관성과 체계에 공을 들이는 경우가 많으므로, 사상 텍스트에는 좀 더 일관성에 대한 기대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셋째, 18세기 일본의 사상가 모토오리 노리나가(本居宣長)는 과거의 텍스트는 일관성을 결여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했다. 그에 따르면, 일본 <고사기>(古事記)에 종종 나오는 모순된 서술은 <고사기>가 믿을 수 없는 사료라는 증거가 아니라 <고사기>야말로 신빙성 있는 사료임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후대에 창작된 것이라면, 명백한 모순을 그렇게 당당히 적어 놓을 리 없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것들은 우리가 주어진 텍스트에서 일견 모순적인 언명이나 취지를 마주쳤을 때 고려해볼 만한 대표적인 쟁점들이다. 그런데 모순적인 어법 아니고는 도저히 표현하기 어려운 삶의 진실 같은 것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논리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일견 모순적인 언어 혹은 시적인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인간의 조건을 생각해 보자. 필멸의 존재로서 인간은, 살아가는 것이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것이 곧 살아가는 것이다. 오늘 하루 살았다는 것은 오늘 하루 죽었다는 것이다. 살아가는 게 곧 죽어가는 것이고, 죽어가는 게 곧 살아가는 것이기에, 인간의 삶을 표현함에 있어 살아간다는 말과 죽어간다는 말이 공존할 수밖에 없다.

논리적인 언어로는
표현하기 어려운 어떤 것들은,
일견 모순적인 언어 혹은
시적인 언어를 통해서 비로소
제대로 표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의 근본 조건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리 내부에 화해하기 어려운 모순적인 열망이 공존할 수도 있다. 영화 <애니홀>에서 주인공 앨비 싱어는 불평한다. 사람들은 인생이 고해라고 하면서 동시에 장수하려고 든다고. 그런 것은 마치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추가 주문을 하는 일과 같다고. 실로 그렇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이 인생이 고통의 무한리필이라면, 리필을 하지 않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장수를 원한다. 고해라는 인생의 술잔을 한 잔 더.
<논어>에 따르면, 공자 역시 그러한 모순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는 이상적인 질서가 구현되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도 분투했다. <논어> 미자(微子) 편은 말한다. “도가 행해지지 않음은 (공자도) 이미 알고 있다.”(道之不行已知之矣) 이것은 공자를 모순적이며 비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는 실패할 것임을 알면서도 그 실패를 향해 전진한다. 그리고 이러한 일견 비합리적인 행동은, 눈앞의 손익을 따지는 이는 꿈꾸지 못할 영웅적인 광채를 공자에게 부여한다.
현대 한국 학계에서 연구의 계획을 설명하고 연구비를 신청하는 프로포절 양식에는 ‘기대효과’에 대해 쓰는 부분이 있다. 어느 학자가 <논어>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기대효과를 쓰는 부분에 “내 연구 결과가 세상에 행해지지 않을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연구한다”라고 쓴다. 이것은 그를 모순적이고 희극적인 인물로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일견 비합리적인 행동은, 눈앞의 손익도 따질 줄 모르는 무능한 학자라는 광채(?)를 그에게 부여한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817418.html#csidxc6a579c6149ceaaaa8cbe46407d918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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