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해방공간의 서정과 시적 인식의 확대

해방은 어느 날 갑자기 예고도 없이 찾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연합군의 승리로 해방을 얻었지만, 그 기쁨도 잠시, 해방은 곧 분단의 비극을 가져다 주었고, 좌와 우의 정치 투쟁의 혼란을 야기시킬 뿐이었다. 1948년 8월 남한만의 단독 정부가 수립될 때까지의 3년간[또는 1950년 6월 25일까지의 약 5년간]은 '나라 찾기'에서 '나라 만들기'로 민족사의 과제가 바뀌어 제시된, 그러나 뚜렷한 역사적 전망은 보이지 않는 텅 빈 무대로서, 이를 일러 흔히 '해방공간'이라고 이름한다. 이러한 해방공간의 최우선 과제는 일제 잔재의 청산과 독립국가의 건설이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지만, 이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민주진영과 공산진영이 첨예하게 투쟁하고, 이에 따라 문단도 좌와 우로 나뉘어 서로 대립하였으니, 곧 분단 현실이라는 민족 비극의 시작이다.

해방을 맞이하여 문단은 재빨리 변신을 모색한다. 그 가장 빠른 몸놀림이 1945년 8월 16일의 '조선문학건설본부'의 조직이다. 이 단체는, 과거 '카프(KAPF :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의 핵심 맹원이었던 임화(林和)와 김남천(金南天)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지만, 뚜렷한 친일 활동을 펼쳤던 일부 문인들을 제외한 범문단적인 구성원들이 함께 참가하여, 상대적으로 좌익적인 정치적 색채는 뚜렷하지 않았다. 이 단체는 그 방향을 같이하는 '조선연극건설본부', '조선영화건설본부', '조선음악건설본부', '조선미술건설본부' 등과 함께 연합 조직인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를 1945년 8월 18일에 결성하여 단시일 내에 전 문화 예술 부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기에 이른다.

한편, 송영(宋影)과 이기영(李箕永)등의 일부 과거의 카프 맹원들은 이러한 '조선문학건설본부'의 뚜렷하지 않은 계급적 색채에 불만을 품고 과거 카프의 정통을 계승하는 의미에서 1945년 9월 17일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을 조직한다. '조선문학건설본부'와 마찬가지로 이 단체도 그 방향을 같이하는 '조선프롤레타리아연극동맹', '―영화동맹', '―음악동맹', '―미술동맹' 등의 단체를 이끌고 1945년 9월 30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을 결성하여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에 대응한다.

이러한 좌익문학 내의 대립은 좌익문학 운동의 힘을 약화시키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게 되어, 이 두 단체는 '조선공산당'의 지침 아래 1945년 12월 13일 '조선문학동맹'으로 통합되기에 이른다. '조선문학동맹'은 1946년 2월 8∼9일 '조선문학자대회'를 개최하여 그 명칭을 '조선문학가동맹'으로 고치고 조직을 개방·확대하여 전 문단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이러한 조직 개편과 정치적 색채에 불만을 품고 1945년 말에서 1946년 초까지 이기영(李箕永), 한설야(韓雪野), 안함광(安含光), 송영(宋影), 박세영(朴世永), 윤기정(尹基鼎), 신고송(申鼓頌), 이북명(李北鳴), 이찬(李燦), 김조규(金朝奎), 박영호(朴英鎬), 김사량(金史良), 이갑기(李甲基) 등의 많은 문인들이 월북을 선택한다. 이들은 북한에서 1946년 3월 25일 '북조선문학예술총동맹' 결성의 핵심적 역할을 맡게 된다.

한편, 이러한 좌익문학의 활동에 대응하여 우익측의 활동도 활발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변영로(卞榮魯), 오상순(吳相淳), 박종화(朴鐘和), 김영랑(金永郞), 이하윤(李河潤), 김광섭(金珖燮), 김진섭(金晉燮), 이헌구(李軒求) 등의 과거 순수문학 활동을 하던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1945년 9월 8일 '조선문화협회'를 조직한다. 이 단체는 1945년 9월 18일 '중앙문화협회'로 명칭을 개칭하고 1945년 12월 전 문단을 망라한 대표 시인의 작품을 묶어 {해방기념시집}을 출판한다. 이 단체는 '조선문학가동맹'의 활동에 맞서 1946년 3월 13일 '전조선문필가협회'를 결성하고, 그 전위 조직으로서 1946년 4월 4일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조직하여 우익문학 활동의 구심점을 형성한다. 이 '조선청년문학가협회'는 조연현(趙演鉉), 김동리(金東里), 서정주(徐廷柱),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하였으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 이후인 1949년 12월 7일 '한국문학가협회'의 조직으로 그 활동이 계승된다.

이렇게 좌·우익이 점차로 첨예하게 대립하게 되고, 1946년 9월 철도 파업 이후 미군정에 의해 박헌영(朴憲永)에 대한 수배령과 공산당의 불법화가 이루어지자 좌익문학 활동은 급격히 위축된다. 이에 따라, 1947년 4월 제2차 전국문학자대회가 수포로 돌아가자 많은 문인들이 대거 월북하게 된다. 이 2차 월북 문인들은 이태준(李泰俊), 김남천(金南天), 임화(林和), 이원조(李源朝), 안회남(安懷南), 오장환(吳章煥), 김동석(金東錫), 함세덕(咸世德), 윤세중(尹世重), 김상민(金常民) 등으로 이들 중 대부분은 1953년 남로당의 숙청과 함께 북한 문단에서 사라지고 만다. 이 외에도 일부 문인들은 6·25전쟁 중에 월북을 선택하였으니, 이들은 박태원(朴泰遠), 이용악(李庸岳), 설정식(薛貞植), 김상훈(金尙勳), 정인택(鄭人澤), 현덕(玄德) 등이다. 반면 김동명(金東鳴), 안수길(安壽吉), 김진수(金鎭壽), 임옥인(林玉仁), 황순원(黃順元), 구상(具常), 최태응(崔泰應), 오영진(吳泳鎭), 유정(柳呈), 김이석(金利錫), 박남수(朴南秀), 전봉건(全鳳健) 등의 문인들은 자유를 찾아 월남한 경우에 해당한다.

이처럼 1945년 8월 15일에서 1948년 8월 15일까지의 3년은 사상과 체제의 선택이 자유로왔던 만큼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첨예하게 맞부딪친 혼란의 시기였다. 이에 따라 문학 활동도 정치적 활동과 맞물려 활발히 진행되었으니, 그 현실은 좌와 우 어느 쪽도 마찬가지였다. 미래에 대한 역사적 전망이 뚜렷이 보이지 않을 때 서정양식이 활발하게 선택됨은 문학사의 보편적 사실인 바, 이 시기에 다른 장르보다도 특히 많은 시들이 창작된 점은 이를 잘 말해 준다. 과거 순수문학 활동에 몸담았던, 정지용(鄭芝溶), 김기림(金起林), 김광균(金光均) 등의 시인들마저도 정치적 색채가 짙은 작품들을 창작해 낼 수밖에 없을 정도로 당대의 문학 환경은 그만큼 정치의 무게에 압도당해 있었던 것이다.

1장(章)에서 우리는 해방의 감격과 함께 분단의 비극을 노래하는 많은 시인들의 애국적 열정을 만나게 된다. 열정적이지만 거칠지만은 않은, 서정성의 품위를 오롯이 유지하고 있는 해방공간의 정선된 작품들을 통하여, 우리는 반세기 전의 우리 민족의 기쁨과 아픔, 그리고 이를 아름다운 시어로 풀어내는 섬세한 시인의 내면을 함께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분명 문학 작품, 그 중에서도 특히 시(詩)가 베풀어 주는 즐거운 혜택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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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지용(鄭芝溶)

1902년 충청북도 옥천 출생

1918년 휘문고보 재학 중 박팔양 등과 함께 동인지 {요람} 발간

1929년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과 졸업

1930년 문학 동인지 {시문학} 동인

1933년 {가톨릭 청년} 편집 고문, 문학 친목 단체 {구인회} 결성

1939년 {문장}지 추천 위원으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김종한, 이한직, 박남수 추천

1945년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중앙 집행 위원

1950년 납북

시집 : {정지용 시집}(1935), {백록담}(1941), {지용 시선}(1946), {정지용 전집}(1988)


1948년 4월 {문학}의 지면을 빌어 "국토와 인민에 흥미가 없는 문학을 순수하다고 하는 것이냐? 남들이 나를 부르기를 순수시인이라고 하는 모양인데 나는 스스로 순수시인이라고 의식하고 표명한 적이 없다."고 하면서 정치적인 시대에 시를 쓰지 못하는 심경의 일단을 드러내 보이기도 한 정지용은, 해방 직후 '문학가동맹' 아동문학부 위원장으로 활동하면서 해방 전의 시작(詩作)과는 전혀 다른 문단 활동을 보여 준다.

이 시는 해방의 감격을 노래한 당대의 대표적 작품의 하나로 해방을 맞아 처음으로 간행된 앤솔로지(anthology : 시모음집)인 {해방기념시집}에 수록되어 있다. 우익문학 단체인 '중앙문화협회'의 주관으로 1945년 12월 발간된 {해방기념시집}은 좌·우익의 구별 없이 전 문단권을 망라하여 24인의 시를 수록하고 있다. 여기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찬가(讚歌)나 헌사(獻詞)의 범주에 머무르고 있는 것이지만, 위의 정지용의 시를 비롯한 몇몇 작품들은 해방을 맞는 감격의 직접성과 내면화된 서정성이 잘 조화되어 있는 뛰어난 수준을 보여 준다.

이 시는 그 부제에서 보듯 해방을 맞아 귀환하는 재외 혁명동지에게 바치는 헌사의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그 귀환의 감격을 2·4·6·9연에 동일한 어구로 직설적으로 반복함으로써 표제시(標題詩)의 의미를 직접 드러내 준다. 재외 혁명동지의 '피 흘리신 보람'은 상대적으로 '죽음보다 어두운 삼십육년'의 고초가 클수록 그 빛을 발휘하는 것이어서, 2·4·6·9연의 '그대들 돌아오시니 / 피 흘리신 보람 찬란히 돌아오시니!'의 어구는 1·3·5·7연으로 표현된 삼십육 년 간의 지난 현실과 적절한 대응을 이룸으로써 그 귀환의 감격을 배가시켜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마지막 8·9연에서 보듯 7연의 고난의 현실 묘사에 이어 해방의 현실을 제시함으로써, 구조의 단조로움을 피하는 한편, 재외 혁명동지들의 귀환이 그저 금의환향이 될 수 없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한다. 그것은 그러한 과거의 '죽음보다 어두운 삼십육년'의 세월이 있었기 때문에 감히 꽃을 밟을 수가 없고 '가시덤불, 눈물로 헤치'면서 귀환해야만 하는 조국의 현실로 상징된다.

이렇듯 귀환의 감격이 클수록 지난 과거의 고초에서 오는 회한과 비극의 강도가 거세지지만, 정지용은 그러한 아픈 상처를 적절히 위무(慰撫)할 줄 안다. 그것은 '외오'·'새론'·'사오나온' 등의 조어법과 '―라'로 끝나는 아어형(雅語形) 어미의 적절한 배합에서 기인한다. 이 점에서 이 시는 직접적 감동과 서정성을 동시에 획득하는 시인 정지용의 진면목을 발견할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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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趙芝薰)

본명 : 조동탁(趙東卓)

1920년 경상북도 영양 출생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고풍의상(古風衣裳)>, <승무(僧舞)>, <봉황수(鳳凰愁)>를 발표하여 등단

1941년 혜화전문학교 문과 졸업, 오대산 월정사 불교전문강원 강사 역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조직

1950년 문총 구국대 기획위원장 역임

1968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역임

1968년 사망

1973년 {조지훈 전집} 발간

시집 : {청록집}(공동 시집 1946), {풀잎 단장(斷章)}(1952), {역사 앞에서}(1959), {여운(餘韻)}(1964)


조지훈은 1947년 3월 {백민(白民)}에 발표한 [순수시의 지향―민족시를 위하여]에서 이른바 '순수시론'을 주장하면서, 좌익문학측의 '진보적 민족문학론'에 맞설 뿐 아니라, 김기림, 정지용 등의 시와 정치의 결합론에 대해서도 반기를 들면서 일약 김동리(金東里)와 더불어 우익문학론의 신진 기수로 부각된다. 김광균(金光均)이나 신석정(辛夕汀)이 과거 그들의 이론적 후원자였던 김기림의 입장에 비교적 찬동하는 색채의 시를 창작하였다면, 이른바 청록파 시인들은 자신들의 스승격이었던 정지용의 입장에 정반대의 비판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특히, 조지훈은 "순수한 시정신을 지키는 이만이 시로서 설 것이요, 진실한 민족정신을 지키는 이만이 민족시를 이룰 것"이라고 하고, 여기에서 순수한 시정신이란 "시류의 격동 속에 흔들리지 않는, 변하는 가운데 변하지 않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며 인간의 본질적인 감성에 귀착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여, 해방공간에서의 문학의 정치주의적 편향에 대해 분명하게 비판적 태도를 취한다.

이 시는 이러한 조지훈의 순수 지향적 태도 속에서도 해방을 맞는 그의 감격이 적절히 형상화되어 있는 해방공간의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해방을 염원하는 그의 간절한 기구(祈求)는 '내 홀로 긴 밤을 / 무엇을 간구하며 울어왔는가'로 1연에서 직설적으로 토로된다. 그러한 그의 '간구'는 온몸을 쇠약하게 하여 핏줄마저 시들어 버리고 가슴도 싸늘하게 식어 버렸지만, 해방의 아침을 드디어 맞는다. 이 감격을 그는 2∼3연의 '아아 이 아침 / 시들은 핏줄의 구비구비로 // 싸늘한 가슴의 한복판까지 / 은은히 울려오는 종소리'로 노래한다. 그리하여 시적 자아*는 '이제 눈 감아도 오히려 / 꽃다운 하늘'임을 기뻐하고 '떠오르는 햇살은 / 시월 상달의 꿈'같이 싱그러움을 깨닫는다.

해방 이전의 길고 긴 침묵의 고통을 생각한다면, 조지훈은 비로소 시를 쓸 수 있게 된 감격을 맞게 된 것이리라. 그는 그러한 자신의 심경을 6연에서 '메마른 입술에 피가 돌아 / 오래 잊었던 피리의 / 가락을 더듬노니'라는 어구로써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이제 더 이상 산상(山上)의 '높으디 높은 산마루'는 인고(忍苦)의 극한적인 공간이 아니라, '새들 즐거이 구름 끝에 노래 부르고 / 사슴과 토끼는 / 한 포기 향기로운 싸릿순을 (서로) 사양'하는 평화와 환희의 공간으로 전환된다. 이러한 전환은 1연의 '낡은 고목에 못박힌듯 기대여'와 마지막 연의 '맑은 바람 속에 옷자락을 날리며'로 대비된다.

그러나 시인의 고통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 과거의 상처를 보듬고 새로운 민주 국가를 건설해야만 하는 민족사의 과제가 새로이 대두되고 있음을, 순수시론자 조지훈도 끝내 외면할 수만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그는 다시 간구하는 자세로 외친다. '내 홀로 서서 / 무엇을 기다리며 노래하는가'라며.

 

* 시적 자아(The Poetic I) : 시 속에서 시인의 서정을 드러내는 인물로서 시인과 세계를 매개하는 주인공이 된다. 서정적 자아라고도 하며, 시인의 메시지를 독자에게 전달하는 가공의 존재로서 시적 화자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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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두진(朴斗鎭)

혜산(兮山)

1916년 경기도 안성 출생

1940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향현(香峴)>, <묘지송(墓地頌)>, <낙엽송(落葉頌)>, <의(蟻)>, <들국화>를 발표하여 등단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결성에 참여

1956년 제4회 아세아 자유문학상 수상

1962년 서울특별시 문화상 수상

1970년 3·1 문화상 수상

1976년 예술원상 수상

1981년 연세대학교 교수로 정년 퇴임

1984년 박두진 전집 간행

1989년 제1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시집 : {청록집}(1946), {해}(1949), {오도(午禱)}(1953), {거미와 성좌}(1962), {인간 밀림}(1963), {하얀 날개}(1967), {고산 식물}(1973), {사도행전}(1973),{수석열전}(1973),{야생대(野生代)}(1981),{에레미야의 노래}(1981), {포옹무한}(1981), {그래도 해는 뜬다}(1986), {돌과의 사랑}(1987), {일어서는 바다}(1987), {성고독}(1987) {불사조의 노래}(1987), {서한체(書翰體)}(1989)


'해'의 시인이요, 자연 교감의 정신을 불러 일으킨 박두진의 첫 시집 {해}의 표제가 된 이 작품은 8·15 해방이라는 벅찬 기쁨 속에서 민족의 웅대한 기대와 민족의 이상을 구가하던 시기에 씌어졌다. 이 시는 '해'라는 구체적 사물을 통해 광복의 기쁨을 제시하는 한편, 어둠이 걷힌 '청산(靑山)'에서 광명한 조국의 미래사, 민족의 낙원이 펼쳐지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시인의 뜨거운 열망을 나타내고 있다.

광복이라는 무한한 자유와 기쁨 속에서는 모든 생명들이 서로 갈등을 빚거나 두려워할 것이 없이 평화롭게 화해하며 살아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둠'·'달밤'·'골짜기'·'칡범'·'짐승'은 악(惡)과 추(醜), 강자(强者)의 이미지를, '해'·'사슴'·'청산'·'꽃'·'새'는 선(善)과 미(美), 약자(弱者)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것으로, 시인은 이들의 대화합을 추구하며 사랑과 평화가 충만한 이상 세계를 그리고 있다.

시인은 생명의 근원이며 창조의 어머니인 '해'가 돋기를 간절히 기원하며, 원시인(原始人)의 원초적 신앙인 태양 숭배와 같은 경이(驚異)와 복받치는 희열(喜悅)로 '에덴 동산'을 연상시키는 조국 광복의 신천지를 예찬하는 동시에, '달밤'으로 표상된 민족의 오랜 슬픔을 배척하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희망찬 미래의 조국을 상징하는 '청산이 있으면 홀로래도 좋아라'라고 외치며, '사슴'과 '칡범', '꽃'·'새'와 '짐승'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사는 영원한 평화와 공존 공영의 '고운 날'을 꿈꾼다. 그 '고운 날'은 결국 '해가 솟은 청산'으로 자연과 인간이 합일되는 이상향이자, 민족의 영화로운 역사가 펼쳐질 해방된 조국 강토를 의미한다.

이와 같이 이 시에서는 당시대적(當時代的) 조국 해방의 기쁨이 영시대적(永時代的) 이상향의 추구로까지 연계·발전되고 있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인으로서의 시인의 면모를 엿볼 수 있다. 그러므로 조연현은 이 작품을 가리켜 "한국 서정시가 이룰 수 있는 한 절정을 노래했다."고 평하고 나서 "박두진은 이 한 편의 시로써 유언 없이 죽을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고 극찬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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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석정(辛夕汀)

본명 : 신석정(辛錫正)

석정(石汀, 釋靜), 석지영(石志永), 사라(砂羅), 호성(胡星), 소적(蘇笛), 서촌(曙村)

1907년 전라북도 부안 출생, 보통학교 졸업 후 향리에서 한문 수학

1924년 {조선일보}에 시 <기우는 해> 발표

1931년 {시문학} 3호에 시 <선물>을 발표한 이후 {시문학} 동인으로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1972년 문화포장(文化褒章) 수상

1974년 사망

시집 : {촛불}(1939), {슬픈 목가}(1947), {빙하}(1956), {산의 서곡}(1967), {대바람 소리}(1970), {난초잎에 어둠이 내리면}(1974) 등


이 시는 식민지 시대의 고통스러웠던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된 작품이다. '어둠'과 '광명'이라는 대립적 이미지를 주축으로 하여 조국 광복의 기쁨을 노래하고 있다. 조국을 상실한 식민지 시대는 '태양'이 없는 암흑기였으므로 '태양'은 곧 조국의 해방을 상징한다.

1연은 일제 치하에서의 지하 독립 투쟁을 개괄적으로 보여 주는 한편, 2연은 식민지의 어두운 시대를 회상하는 내용이다. '달빛이 흡사 비오듯 쏟아지는 밤'이라도 그것이 밤인 한, 어둠이고 암흑일 수밖에 없기에 '우리는 헐어진 성터를 헤매이면서' '가슴을 쥐어 뜯으며' 조국 해방을 갈망하였던 것이다. '헐어진 성터'는 국권 상실의 비극을 은유하고 있으며, 반복법으로 국권 회복을 간절히 바라는 심경을 강조하고 있다. 3연은 애국 투사의 죽음과 방랑, 변절과 전향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반복적 운율로 토로하고 있다. 이와 함께, 그들의 죽음과 방랑에 가슴 아파하는 동시에, 일제에 굴복하거나 타협한 이들에 대해선 뜨거운 민족애로 감싸 주려는 시인의 따스함이 느껴진다. 4연에서는 마침내 오랜 고통 끝에 잃어버린 태양을 되찾았지만, 새로운 민족국가를 아직 수립하지 못한 채, 좌·우익의 이념 갈등으로 인해 '겨울밤 달이 아직도 찬' 혼란스러운 정국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마지막 5연에서 시인은 근심스런 시선으로 불안한 시대 상황을 바라보면서, 이러한 혼란과 갈등을 모두 극복한 후 이루어 낼 하나의 조화로운 민족국가 건설에의 벅찬 기대감을 '분수처럼 쏟아지는 태양을 안고 / 꽃덤불에 아늑히 안기는' 것으로 표현하였다. 그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의 태양을 오롯이 되찾는 것이라고 시인은 굳게 믿고 있는 것이다.

신석정은 이 시에서 보듯, 우익 진영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당대의 정치적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민족국가 건설이라는 새로운 민족사적 과제에 부응하는 시를 창작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과거 '시문학파' 시절의 긴장도(緊張度)와 서정성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미덕을 보여 주고 있는 바, 이 외에도 <삼대>, <움직이는 네 초상화> 등 다수의 작품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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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영출(趙靈出)

본명 : 조명암(趙鳴岩)

1913년 충청남도 아산 출생

1935년 보성고보 졸업

1941년 일본 와세다(早稻田)대학 불문과 졸업

1945년 조선연극동맹 부위원장 역임

1948년 월북


해방 이전 대중극(大衆劇) 활동을 하면서 수많은 대중가요의 가사를 창작하기도 한 대중예술인 조영출은, 해방 직후에는 {연간조선시집}, {횃불} 등의 시집에 다수의 시를 발표하다가 월북하여, 우리의 문학사에서는 거의 잊혀진 존재로 남아 있다.

이 시는 해방의 아침을 맞는 감격을 새 생명의 탄생과 대응시켜 영탄조의 호흡 속에서 노래하고 있다. 시적 화자는 과거 일제의 식민지 지배를 '슬픈 압제의 밤'으로 규정하고, '오오 지금'의 '흰 비둘기' 날고 '붉은 태양' 빛나는 해방의 아침과 대비시킨다. 과거 '눈 쌓인 허허 벌판'과 '눈싸락 차운 국경의 빙판'을 '피걁방울 흘리며' '피 눈물 방울 흘리며' 헤매면서도, 시적 화자로 대유된 많은 투사들의 항쟁에 의해 '슬픈 압제의 밤'에서도 '사상이 꽃처럼 피'어 나고, 비록 그들이 죽더라도 '눈보라 속에 파묻힌 님의 눈동자'와 '마음의 광채'는 '강보의 어린 울음'으로 살아난다. 그리하여 비록 '님'은 가도 '어린 생명은' 감시의 '칼날이 선 울타리 속에'서도 '목숨이 살어' 지금 해방의 새 아침을 맞는다.

'푸른 하늘'에 '태극기 꽂힌 지붕을 넘어오는 / 흰 비둘기'가 날고 '붉은 태양'이 빛나는 환희의 새 아침이지만, 그럴수록 지난날에 대한 회한은 가슴에 사무친다. 오늘의 청(靑), 홍(紅), 백(白)의 색채 이미지가 선명하게 제시될수록 눈[雪]과 피로 제시되는 과거의 시각적 대비도 한층 뚜렷해진다. 그리하여 결코 시적 화자는 그러한 우리의 역사를 잊을 수 없어, 과연 '슬픈 역사의 밤은 영원히 밝었느냐'고 자문(自問)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영탄적 어조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그 감격이 단순한 환희의 찬사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해방을 맞을 수밖에 없는 '슬픈 역사'의 반추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자기 비판적 성찰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행의 의문에 대한 긍정적 해답이 여전히 불투명한 해방공간의 현실에서 시인은 결국 월북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이 또한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이 시는 영탄적 어조로 해방의 감격을 노래하고 있으면서도, 그 감격이 단순한 환희의 찬사로만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부끄럽게도 해방을 맞을 수밖에 없는 '슬픈 역사'의 반추를 통하여, 새로운 미래를 기약하는 자기 비판적 성찰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 시의 마지막 행의 의문에 대한 긍정적 해답이 여전히 불투명한 해방공간의 현실에서 시인은 결국 월북의 길을 선택하고 만다. 이 또한 '슬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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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기림(金起林)

본명 : 김인손(金仁孫)

편석촌(片石村)

1908년 함경북도 성진 출생

1921년 보성고보 중퇴 후 도일, 릿쿄(立敎)중학 편입

1926년 니혼(日本)대학 문학예술과 입학

1930년 졸업 후 조선일보 기자

1931년 {신동아}에 <고대(苦待)>,<날개만 돋치면>을 발표하여 등단

1933년 이효석, 조용만, 박태원 등과 구인회(九人會) 창립

1935년 장시 <기상도(氣象圖)> 발표

1936년 도호쿠제국대학(東北帝大) 영문학과 입학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의 조직 활동 주도

1950년 6·25 때 납북

시집 : {기상도}(1936), {태양의 풍속}(1939), {바다와 나비} (1946), {새 노래}(1948)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에 가담하여 '전국문학자대회'의 준비 위원으로서 [우리시의 방향]이라는 주제 강연을 발표한 바 있으며, '조선문학가동맹' 중앙집행위원이자 시부 위원장의 지위에 오른 김기림, 그의 돌연한 사상적 전향은 우리 현대문학사에서 대단히 이채로운 사건에 해당한다. 1930년대 모더니즘 시론의 주창자로서 임화(林和)와 이른바 '기교주의 논쟁'을 벌이면서 많은 순수주의 시인들의 이론적 지주의 역할을 맡았던 그의 전향은, 소설에서의 이태준(李泰俊)의 전향과 함께 해방공간의 문학과 정치와의 함수관계를 다시 한번 환기시켜 준다. 이태준은 그의 소설 <해방 전후>에서 주인공 '현(玄)'의 입을 빌어 자신의 전향을 합리화시키고 있거니와, 김기림은 위의 [우리시의 방향]이라는 강연에서 "시인은 자유와 정치를 지키는 넓은 동맹군의 일익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하여 정치와 시의 적극적 결합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해방공간 김기림 시의 대부분은 그 전의 작품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강한 정치성이 드러난다.

이러한 점에서 <연가>는 이 시기 그의 시로서는 드물게 정치적이고 선동적인 표현이 적고 서정시의 여백(餘白)까지도 맛볼 수 있는 정제된 미감을 지니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의 시적 자아는 '육로로 천리 수로 천리'를 건너 드디어 임을 만난다. 그들은 '새나라'에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왔지만, 여전히 식민지 치하에서의 유랑의 상처를 벗어날 수는 없다. 그리하여 그들은 서로 만나 사랑을 나누는 즐거운 밤에서조차도 놀라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을 꾸고 '그대 앓음소리'는 삼라만상의 소리로 들려 올 정도로 병이 깊다. 그러나 '새나라'로 오는 즐거움에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희망이 피'고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운 것도 전혀 흉잡힐 것이 아니다. 이제는 어떤 고난도 두렵지 않아,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을 수 있고, 사랑이 뜨거우면 '이리도 피해 달아'날 정도로 서로에 대한 확신이 선다. 이러한, 헤어지지 않으리라는, 어떤 고난도 극복할 수 있으리라는 사랑의 언약은 '새나라'를 맞이하였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것을 시적 자아는 마지막 연에서 '새나라 언약이' 화려하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그럴 때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라고 하며 죽어도 좋다고까지 생각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비교적 상징적인 이미지를 사용하여 새나라를 맞는 시인의 감격을 형상화하는 데 성공하고 있으며, 그러면서도 어떠한 정치적 색채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서정시의 묘미는 이처럼 그 취의(趣意)를 직설적으로 표백하지 않는 내면화의 미감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김기림뿐 아니라 거의 모든 시인 들의 작품 중에 그러한 시가 오히려 드물 정도로, 해방공간의 문학 외적 환경은 비관적이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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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화(林和)

본명 : 임인식(林仁植)

청로(靑爐), 김철우(金鐵友), 쌍수대인(雙樹臺人), 성아(星兒), 임(林)다다, 임화(林華)

1908년 서울 낙산(駱山) 출생

1921년 보성고보 입학

1925년 졸업 직전에 중퇴

1926년 12월 카프(KAPF) 가입

1928년 <유랑(流浪)>, <혼가(昏街)> 등의 영화에 주연 배우로 출연

카프 중앙 위원

1929년 박영희의 후원으로 동경으로 떠남. 무산자사(無産者社)에서 활동

1931년 귀국. 카프 1차 검거 사건에 연루되었으나 불기소 석방

1932년 카프 서기장

1945년 8월 조선문학건설본부 조직, 서기장

1946년 2월 조선문학가동맹 중앙 집행 위원

1947년 4월 월북

1953년 8월 '미제 스파이' 혐의로 사형

시집 : {현해탄(玄海灘)}(1938), {찬가(讚歌)}(1947), {회상시집}(1947)


과거 카프의 서기장이었던 임화, 그러면서도 스스로 조직의 해산계를 경기도 경찰국에 제출하였던 임화는 해방 그 이튿날, 동지 김남천(金南天)과 함께 '조선문인보국회'의 간판을 '조선문학건설본부'로 바꾸어 내걸면서 다시 문학 운동의 전면에 나서게 된다. 그는 자신이 주도한 '조선문화건설중앙협의회'의 서기장의 자리에 앉으면서, 과거 카프 시절의 영향력을 다시금 획득하는 데 성공한다. 그는 계속하여 '조선문학가동맹'의 결성을 주도하고 좌익측의 '진보적 민족문학론'의 이론적 구심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본질적으로 낭만주의 시인이었다. 훗날 1953년 6·25 전쟁 패전의 책임을 지고 남로당의 박헌영(朴憲永) 일파가 숙청될 때, 설정식(薛貞植)과 함께 기소되어 사형을 언도받은 임화의 반역죄의 첫 빌미는, 공교롭게도 그 자신이 전쟁 중에 쓴 <너 어느 곳에 있느냐>, <바람이여 전하라> 등의 시가 마련해 주었다. 전쟁 중에 북으로 후퇴하면서 서울에 두고 온 딸을 그리워하고, 출전한 병사가 고향에 계신 어머니의 안위를 걱정하는 이 시들은 공통적으로 애상적이고 낭만적인 정조를 그 특징으로 지닌다. 이러한 시를 통하여 패배의식과 비굴감을 조성하여 전쟁 수호에 장애가 되었다는 것으로부터 임화는 자기 비판을 받기 시작하였고, 끝내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의 나이 마흔 다섯의 일이다.

이 시는 이러한 임화의 해방공간에서의 내면 풍경을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이 시는 그가 해방 이전에 창작한 바 있는 <네 거리의 순이>(1929), <다시 네 거리에서>(1935) 등의 '네 거리―' 계열의 시와 그 맥을 같이한다. 그는 이 시들에서 공통적으로 식민지 치하의 전형적 민중의 여성상으로서 '순이'라는 가상의 누이를 설정하고 그를 바라보고 있는 오빠의 시선으로 시적 화자의 역할을 맡고 있다. <네 거리의 순이>의 순이는 마음 여린 소녀였으나, <다시 네 거리에서>의 순이는 결혼하여 어린 딸을 희생시킨 투사의 이미지를 지니고 있고, 위의 <9월 12일 ―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는 그 순이마저 죽고 없는 시간의 경과를 보여 준다. 위의 시의 부제가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앞의 두 작품에 대한 임화의 애착을 알 수 있을 뿐 아니라, 이러한 이들 작품의 연관성 하에서 은연중 드러내고 싶은 해방공간의 그의 내면 풍경을 엿볼 수 있다.

'조선 근로자의 / 위대한 수령'으로 표상되는 박헌영의 연설이 거리를 달리고, '위대한 수령의 만세 부르며 / 개아미마냥'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지만, 시적 화자는 '부끄러운 / 나의 생애의 / 쓰라린 기억'으로 '종로거리'[네 거리]를 '현기로워 바라볼 수 없'다. 그렇다면 그의 부끄러운 기억은 무엇일까. 그것은 그 동안 제대로 투쟁하지 못했다는 기억, '어데선가' 누이[순이]는 외로이 죽고, 동무들은 '찬 옥방(獄房)'에서 숨져 갔지만, '모두 다 살아오는 날 / 그 밑에 전사하리라'하고 노래만 부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의 과거를 의미한다. 과거 카프 1, 2차 검거 때 유일하게 피검되지 않았던 서기장 임화는, 이렇게 해방을 맞아 갖혀 있던 투사들이 거리를 행진할 수 있는 만큼, 오히려 부일(附日)의 길을 걸었던 과거에 대한 자기 비판과 연민에 부끄러울 뿐이다. 이제 해방이 되자 시적 자아는 오히려 죽지 못해 살아온 과거를 비판하고 '노래처럼 / 죽는 생애의 / 마지막을 그리워 / 눈물짓는 / 한 사람'이 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간단하고 쉬운 일이 아니라, 진정코 용기를 지녀야만 가능한 것임을 그 누구보다도 그 자신이 잘 알고 있었기에 그는 다시금 독립된 한 연(聯)의 표현으로써 다짐하는 것이다. '원컨대 용기이어라'라고.


앞의 <9월 12일 ― 1945년, 또다시 네거리에서>가 시인 자신의 내면 풍경을 은연중 보여 주는 서정적 정조를 지니고 있다면, 이 시는 당대의 모순을 직시하고 그것에 맞서 싸우기를 권고하는 선동시에 가깝다. 해방공간의 우선적인 민족사적 과제는 당연히 독립국가의 건설이지만, 좌익측에서는 이것을 이루기 위한 전 단계로 봉건 잔재, 일제 잔재의 청산을 가장 시급한 실천 과제로 제시한다. 이와 관련하여 박헌영은 이른바 '8월테제'로 불리는 지침에서 '부르주아 혁명 단계'를 설정하고 이를 위해 투쟁하기를 강조하였지만, 결국 미군정 당국에 의해 공산당은 불법화되고, 박헌영 자신은 수배를 받고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러한 당대의 현실에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임화 특유의 선동적인 리듬으로 창작한 작품이 바로 이 시이다.

'노름꾼과 강도를' 잡아야 하는 경찰이 '위대한 혁명가의 / 소매를 쥐려는' 현실을 시적 화자는 용납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민중을 선동한다. '동포여! / 일제히 / 깃발을 내리자'하고. '깃발을 내리자'라는 표현은 간단하면서도 가장 분명한 주제의 표출이다. 그것은 당시 날리고 있는 깃발의 주체, '미군정'을 타도하자는 선동적인 표현에 다름 아니다. 조선총독부의 깃발이 일장기에서 성조기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그 곳은 '가난한 동포의 / 주머니를 노리는 / 외국 상관(商館)의 / 늙은 종들이 / 광목(廣木)과 통조림의 / 밀매를 의논하는 / 폐(廢) 왕궁'인 것이다. 그런가 하면 당대의 현실은 '살인의 자유와 / 약탈의 신성이 / 주야로 방송되는 / 남부조선'으로 인식된다. 이러한 현실이므로 시적 화자는 '깃발을 내리자'고 선동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시에서 시인의 현실 인식에 공감할 필요는 없다. 단지 이러한 현실 인식이 그에 부응하는 시적 리듬감을 수반하여 창작될 때, 이 시와 같은 '우수한' 선동시가 가능해진다는 평범한 사실만 다시금 확인할 수 있으면 된다. 이 시는 첫 연의 첫 행부터 '노름꾼'과 '강도'라는 자극적인 시어를 사용하여 독자의 시선을 끌고, 결국은 '잡든 손'의 주체가 오히려 '노름꾼'이고 '강도'라는 점을 강조하는 효과를 얻고 있다. 이 밖에도 '욕된'· '가난한'·'늙은'·'밀매'·'폐(廢)'·'살인'·'약탈'·'더러운' 등의 거칠고 부정적인 이미지의 시어가 짧은 시행의 급박한 리듬과 조화를 이루어 이 시의 선동성을 배가시켜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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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장환(吳章煥)

1918년 충청북도 보은 출생

1931년 휘문고보 입학

1933년 {조선문학}에 시 <목욕간> 발표

1936년 {낭만}, {시인부락} 동인

1937년 {자오선} 동인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맹원

월북

시집 : {성벽(城壁)}(1937), {헌사(獻詞)}(1939), {병든 서울}(1946), {나 사는 곳}(1947)


오장환은 일제 말기에 붓을 꺾지 않으면서도 친일의 길을 걷지 않은 몇 안 되는 시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초기시에서 보여 주었던 유교적 인습에 대한 부정과 반항의 세계가, 해방 이후에는 이 시에서 보듯, 새 시대에 대한 전망과 기대의 이미지로 발전되어 나타나게 된다. 신장병으로 인해 8·15 해방을 병상에서 맞은 오장환은, 광복의 감격과 어수선한 해방 정국에서의 울분과 좌절을 이 시를 통해 '병든 서울'이라는 상징어로 토로하고 있는 것이다.

시적 화자인 '나'로 대치된 시인이 8월 15일 병원에서 운 것은 단순히 기쁨 때문이 아니라, '탕아로 / 홀어머니 앞에서 죽는 것이 부끄럽고 원통'해서였다고 믿었지만, 하루가 지난 뒤 정신이 들고 보니 이는 실로 '너무나 가슴을 터치는 사실'임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날마다 병원을 뛰쳐나간다. 그러나 '싱싱한 사람 굳건한 청년, 씩씩한 웃음이 있는 줄' 알았던 네거리의 '병든 서울'은 단지 '눈깔에 불을 켜들고 날뛰는 장사치'와 '무슨 본부, 무슨 본부 / 무슨 당, 무슨 당의 자동차'만 가득할 뿐이다.

그리하여 그는 '그렇다. 병든 서울아 / 지난날에 네가, 이 잡놈 저 잡놈 / 모두 다 술취한 놈들과 밤늦도록 어깨동무를 하다시피 / 아 다정한 서울아 / 나도 밑천을 털고 보면 그런 놈 중의 하나이다'라며 울부짖는다. 식민지 치하에서 '나'가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안은 그저 술 먹고 돌아치는 것이었고, 여기에는 너도 나도 잡놈일 뿐이어서 서울은 오히려 다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일파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어제까지 황군(皇軍) 위문 공연을 다니던 문학인들이 오늘은 너도 나도 민족문학을 부르짖고, 정치를 한다는 사람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정당을 구성하는 데에 혈안이 되어 버린 해방 정국은 이미 그가 꿈에 그리던 그러한 마음 속 고향이 아니었다.

그의 이상은 '아, 인민의 이름으로 되는 새 나라'의 건설이건만,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병원에서 뛰쳐나와 '인민의 이름으로 씩씩한 새 나라를 세우려 힘쓰는 이들'과 함께 '인민의 공통된 행복'을 위하여 노력하지만, 어느새 서울엔 다시금 '술취한 망종'이 다시 들끓고 있을 뿐이다. 잠시 동안 해방의 감격에 취해 있었던 그는 이제 '큰물이 지나간 서울의 하늘'과 '젊은이의 씩씩한 꿈들'을 보고 싶어서, '길거리에 자빠져 죽는 날'까지 다시금 반항할 것을 마음먹는다. 그리하여 그는 '그 동안 슬픔에 울기만 하여 이냥 질척거리는' 눈을 뽑아 버리고, '그 동안 독한 술과 끝없는 비굴과 절망에 문드러진' 쓸개를 내팽개치겠다고 다짐하는 것이다.

해방 정국의 감격과 울분을 노래하는 이 시는 이러한 격정이 호흡을 적절히 가다듬게 하는 선동적인 리듬감과 조화를 이루어, 거칠면서도 절제된 시인의 내면의 심상을 효과적으로 표현하는 데 성공한 작품이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 그 좋은 예가 된다.

'아름다운 서울, 사모치는, 그리고, 자랑스런 나의 서울아 / 나라 없이 자라난 서른 해 / 나는 고향까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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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세영(朴世永)

백하(白河)

1907년 경기도 고양 출생

1922년 배재고보 졸업 후 중국 혜령영문전문학교에서 수학. で염군(焰群)と 동인

1924년 귀국 후 사회주의 예술운동에 가담

1927년 시 <농부 아들의 탄식>, <산협(山峽)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작가 생활 시작

1937년 배재고보에 근무

1945년 조선프롤레타리아문학동맹, 조선문학가동맹 맹원

1946년 월북

1989년 사망

시집 : {산제비}(1938), {횃불}(공동시집,1946)


해방공간에는 해방의 감격이나 분단의 비극을 노래한 시들뿐 아니라, 이 시처럼 과거 일제의 침략을 규탄하는 일제 잔재 청산의 주제를 취급하고 있는 작품도 많이 창작된다. 이 시는 그러한 작품들 중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시적 화자인 오빠가, 동생 순아가 열 여섯 살일 때 조국을 떠나, 해방이 된 뒤 동생을 만나 보니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한 것에 대한 감흥을 읊고 있는, 평이한 서술의 작품이다. 이러한 이 시의 서사 구조를 따르자면, 이 시는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 단락은 1∼4연으로 시적 화자의 누이의 과거에 대한 회상 장면이다. 그 때 '사랑하는 순아'는 '밤벌레같이 포동포동하고 / 샛별 같은' 눈을 지닌 '열 여섯의 소녀'였지만, 시적 화자가 '집을 떠나자마자 / 서울로 갔'다. 시골에서는 살 수 없어 '집에는 홀어머니만 남기고' '놈들의 꼬임에 빠져' 서울로 떠난 것이다. 시적 화자의 회한이 여기에 이르자, 2단락인 5∼6연에서는 먼저 집을 떠났던 자신에 대한 회상으로 접어든다. 그러나 그가 떠난 것은 살 수 없어서라기보다는 '우리들의 일을 위하여 / 산 설고 물 설은 딴 나라로' 망명하여 간, 조국의 광복을 위한 선택이었음이 강조된다.

3단락인 7∼9연에서는 다시 고향에 돌아온 순아의 모습을 보고 느끼는 시적 화자의 분노의 감정을 드러낸다. '빼앗긴 조국은 해방이 되'었지만 '병든 몸으로 돌아'온 누이의 모습을 보고는 시적 화자는 절망과 안타까움을 느낀다. 그것은 가장으로서 집을 돌보지 못하여 어린 누이까지 공장으로 내몰게 된 데 대한 자책감이자 동시에 일제의 간악한 수탈에 대한 뼈저린 분노의 표현이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놈들의 공장 악마의 넋이 아직도 씨'어 있다는 직설적인 어구로 드러낸다. 마지막 단락인 10∼11연에서는 시상(詩想)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이제 해방의 현실로 돌아와 시적 화자는 다시 적극적인 의지로 새 시대를 준비하고자 하고, 그럴 때 순아는 집을 돌보면서 오빠의 일을 뒷바라지하고자 한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그러나'라는 강한 부정의 접속어로 새 단락을 이끌면서, 과거의 아픔을 딛고 굳세게 살아가려는 새 시대의 민중상으로 파악한다. 따라서 이 단락은 과거의 타락했던 죄과들을 반성하지 않은 채, 오히려 해방이 되었다고 다시금 시대의 전면에 나서 부귀영화를 꾀하고자 하는 친일 모리배들을 싸잡아 비판하는 시대적 메시지로 읽혀진다.

이 시는, 시적 화자가 동생을 앞에 놓고 대화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구어체의 표현이 그 묘미를 얻고 있다. 이와 함께 익숙한 일상적인 시어들을 통해 순아의 존재가 해방공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희생자로서의 이웃으로 표상될 뿐 아니라, 그럴수록 과거 친일파의 무리들에 대한 비판의 강도는 높아지게 된다. 이처럼 이 시는 분명하고도 선동적인 표현이 없이도 해방공간에서의 정치적 색채를 잘 드러낸 대표적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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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균(金光均)


1914년 경기도 개성 출생

송도상업고등학교 졸업

1926년 {중외일보}에 시 <가는 누님> 발표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가

1937년 {자오선} 동인으로 참가

1950년 이후 실업계에 투신

1990년 제2회 정지용 문학상 수상

1993년 사망

시집 : {와사등(瓦斯燈)}(1939), {기항지(寄港地)}(1947), {황혼가(黃昏歌)}(1957), {황조가(黃鳥歌)}(1969)

김광균은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조직부장을 맡으면서 과거 이미지즘 위주의 시를 쓰던 경향과는 완전하게 다른 시작(詩作)의 면모를 드러낸다. 그러면서도 그는 정지용이나 김기림과는 달리 시의 정치적 편향을 비판하면서 시인의 정신 세계를 개척하는 길만이 민족시의 방향임을 주장한다.

이 시는 '조선문학가동맹'의 시분과에서 1946년 3월 1일을 기념하여 간행한 {3·1기념 시집}에 수록된 일종의 기념시의 성격을 지닌다. 대부분의 기념시가 기념의 대상에 대한 일방적인 찬사의 특징을 분명하게 드러내는 것이라면, 이 시는 오히려 기념하는 주체의 솔직한 자기 비판의 의미를 지닌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1914년 생인 김광균은 1919년 3·1운동 당시 다섯 살의 나이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조선독립만세 소리는 / 나를 키워준 자장가'라고 담담하게 서술하고 있는 것에서 보듯, 이 시의 시적 화자는 시인의 목소리를 분명하게 대변해 주고 있다. 그 때 아버지를 여의었고 봄은 해마다 반복되어, 해방이 된 오늘날에도 다시 3·1날의 노래를 부르지만, 오히려 가슴 아플 뿐이다. 그것을 시인은 7∼9행과 20∼22행의 '3·1날이여 / 가슴 아프다 / 싹트는 새 봄을 우리는 무엇으로 맞이했는가'라고 반복하여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전체가 22행의 단연시로 구성되어 있지만, 위의 반복구를 기준으로 해서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럴 때 전반부는, 과거의 회상으로서의 3·1날을 노래하는 동시에, 1946년의 3·1날을 노래하는 후반부의 전제의 구실을 한다고 볼 수 있다. 당연히 시인의 관심은 당대의 현실에 놓이는 바, 그의 현실 인식은 '겨레와 겨레의 싸움 속'과 '해방의 종소리는 허공에 사라진' '눈물에 어린 조국'으로 표상된다. 해방된 지 1년도 채 못되어 좌·우익의 투쟁은 날로 거세어 가고, 해방의 감격은 어느새 '땅 속에 묻혀'져 버린 현실 속에서 시인은 '이 시를 눈물로' 쓰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김광균은 비록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은 하였지만, 맹목적인 이데올로기 추구와 시의 정치적 편향을 경계하면서, 3·1날을 떳떳이 맞을 수 없는 후손으로서의 부끄러움을 솔직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이러한 김광균의 가슴앓이가 여전히 치유되지 않고 있는 우리의 부끄러운 현실에 대해서는, 과연 그 어떤 지도자가 진실로 가슴 아파할 것인가. 아, 진실로 가슴 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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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정식(薛貞植)

1912년 함경남도 단천 출생

1929년 농업학교 재학중 광주학생사건에 가담한 이유로 퇴학

1932년 연희전문학교 입학

1936년 미국 오하이오주 마운트 유니온대학에서 영문학 전공. 이후 콜롬비아대학에서 2년간 더 연구

1945년 해방 직후 미군정청 근무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 외국문학부 위원장

1948년 {서울 타임즈}라는 영자(英字) 신문 편집자

1950년 월북하여 이후 숙청됨

시집 : {종(鐘)}(1947), {포도(葡萄)}(1948), {제신(諸神)의 분노(憤怒)}(1948)


해방 직후 소설가, 시인, 번역가로 활동한 설정식은 우리 문학사에서 매우 이채롭고 문제적인 존재이다. 일찍이 광주학생운동에 가담하여 퇴학을 당한 후, 중국 체험을 하고, 다시 연희전문에 입학하여 미국문학 전공자로서 수석을 다투던 설정식은 매우 드물게 직접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신세대 지식인에 해당한다. 해방 직후 미군정청 공보처 여론국장으로 활동하게 된 사실을 두고, 스스로 "나는 미국인이 나를 쌍수로 들어 받아들인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자부심이 가득하였던 설정식은, 그러나 문학인으로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여전히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 있는 의문의 존재이기도 하다.

미군정청에 근무를 하고 있으면서도 남로당 지하 조직에 관여하고 '조선문학가동맹'에 적극 가담하여 외국문학부 위원장의 지위에 오른 그는, 해방 이후에만 3권의 시집을 상재(上梓)하고, 6편의 소설을 발표하는 등 왕성한 창작 활동을 펼친다. 공산당에 대한 탄압이 격심해지자 그는 창작을 중단, 세익스피어 연구에 몰두하고, 한때 사상 전환 기관인 '보도연맹'에 가입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는, 6·25 전쟁 중 자진하여 인민군에 입대하여, 소좌의 계급으로 판문점 회담 통역관으로 활동하기도 하였지만, 결국 1953년 남로당 일파 숙청시에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으로 사형당한다. 이러한 설정식의 매우 이채로운 삶은 해방공간에 처한 지식인의 문제를 가장 여실히 보여 주는 전형적인 경우라 할 만하다. 즉, 스스로 선택한 미국 유학의 길과 그로 인한 미군정청 근무, 그리고는 다시 "(미국이) 자기네 군사 기지를 가진 나라에 대한 관심보다 군사 기지 자체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보았다."고 하여 스스로 사직, 반미·친공의 길을 선택하지만, 결국 그로 인해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해방공간의 지식인의 비극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해방 이후 1946년까지 창작한 그의 시는 제1시집 {종} 속에 전부 수록되어 있고, 1947년에 쓴 것은 {포도}에, 그리고 1948년 초기 발표분은 {제신의 분노}에 수록되어 있다. 이러한 그의 시작(詩作)은 대략 세 단계로 설명된다. 그 첫째는 시집 {종}과 {포도}에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는 '태양'의 이미지와 관련된 <해바라기> 연작이고, 둘째는 <해바라기> 연작에서 보이는 새 역사 창조의 이념이 한 단계 높은 상징성을 획득하고 있는 <종>의 세계, 세 번째는 시인의 목소리를 작중 화자의 목소리로 일치시켜 민족사적 과제를 직접 제시하는 예언자적 목소리의 <제신의 분노>의 세계이다.

<해바라기 3>은, 그의 <해바라기> 연작 중에서도 새 역사의 이념으로서의 '해바라기'와 천도(天道)의 표상으로서의 '태양'과의 갈등을 첨예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다. 즉, <해바라기 1>과 <해바라기 2>에서는 해바라기가 곧 태양의 표상으로서 새 역사의 초석을 세울 수 있는 일차적인 힘을 상징한다고 본다면, <해바라기 3>에서는 '호올로 / 태양에 필적'하여 역사적 전망과 의지를 담고 있는 상징적 주체로 자리잡는다고 볼 수 있다.

'태양'은 '사슴의 목을 말리고 / 수풀에 불을 지르고/ 바다 천심을 짜게' 만드는 '무도한' 존재로서 '인간 우에 군림'한다. 이러한 태양 아래에서 '인간은 또 인간 우에 개가를 부르'는 타락의 삶을 살아간다. 그것을 시적 화자는 '모든 꽃이 아름다운 십자가에 속은 날 / 모든 열매가 여지없이 유린을 당한 날 / 그들이 보다 원죄로 돌아간 날'로 규정한다. 이러한 현실 아래에서, 종래 태양을 따라 돌면서 태양을 향하는 바로 그 속성으로 인하여 태양의 표상으로 상징되던 '해바라기'는, '차라리 견디기 위하야', '차라리 믿음을 위하야', 그리고 민족의 '미래를 건지기 위하야' '호올로 / 태양에 필적'하는 존재로 전환한다.

그러나 이러한 '해바라기'의 이미지의 전환은 어디까지나 관념적이다. 즉, '태양에 호올로 / 필적하는' '해바라기'를 통해서 시인은, 새 역사 창조, 새 나라 창조에 대한 의지와 사랑을 강조하려고 하지만 여전히 그 비유와 언어감각은 낯설고 거칠다. 그만큼 그의 시작(詩作) 행위는 극히 단순한 이념의 열정적 표출로 귀결된다.


이 시는 <해바라기> 연작의 다음 단계로서 설정식의 시작(詩作) 행위를 잘 보여 주는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서, 시집 {종}의 표제가 된 작품이다.

이 시는 종소리의 의미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전반부인 1∼3연은 신음의 종소리를 상징한다. 종은 '만 생령 신음을' 간직하고 '항상 돌아앉어 / 밤을 지키고 새우'는 존재로서 감히 그 '존엄을' 깨뜨릴 수가 없다. 그러나 역사에 따라서는 권력의 폭압이 그 '등을 두드려 / 목메인 오열을 자아내'기도 한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종의 운명을 거부하여, 차라리 '영어에 물러진 살이어든 / 아 권력이어든 아깝지도 않은 살을 저미라'고 지사적 풍모를 드러내기도 한다. 후반부에서는 자유의 울림으로서의 종소리를 강조한다. 4연에서는 자유의 공허함에 절망하지만, 5연에서 시적 화자는 종 속에 흡수되어, '동혈보다 깊은 네 의지 속에 / 민족의 감내를 살게 하라 / 그리고 모든 요란한 법을 거부하라'고 하여, 6연에서의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린다.

권력에 얻어 맞아 우는 신음 소리이든 스스로 우는 자유의 울림이든, 종을 울게 하는 힘은 역사에서 오는 것이라면, 그 종은 곧 '민족' 자체임을 깨달은 시적 자아는, '내 간 뒤에도 민족은 있으리'라고 하여 민족의 절대성을 믿고 '스스로 울리는 자유를 기다'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종[민족]은 영원히 신음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어서 '내 간 뒤에도 신음은 들'릴 것이라는 것도 안다. 그럴 때 시적 자아는 새벽을 깨우는 '파루를 소리없이 치라'는 시인의 목소리를 직접 전달한다.

이와 같이, <해바라기> 계열의 작품이 천도(天道)로서의 태양과 새 역사 창조의 이념으로서의 또 다른 태양을 직접적으로 노래한 것이라면, 이 시의 세계는 그보다 한 단계 높은 상징성을 획득한 것으로서 <해바라기>의 직접성을 종소리 하나에 합일, 심화시킨다. 즉, 자유와 민족은 영원하다는 것, 그 자유 획득을 위한 투쟁에서의 민족의 감내(堪耐)와 인종(忍從)을 깊이 감춘 것, 그런 의지가 종소리라는 것이 이 시가 담고 있는 상징적 의미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밤과 어둠을 지키는 것과 권력의 폭력에 우는 것, 그리고 민족과 자유와 끝내 함께하는 것과 권력의 폭력에 신음하는 것, 이것이 바로 종의 운명이라고 시인은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종'을 '너'라고 호칭하는 직접적인 의인법에다 명령형을 동반하여 시적 대상으로서의 사물의 형상화는 전혀 고려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시적 화자와 시인 사이의 간격을 철저히 없애 버린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의 목소리는 그대로 시인의 목소리로서 예언자적 진실성을 획득한다. 이러한 예언자적 목소리가 크게 울릴 수 있는 현실이 또한 해방공간의 특수성일 터인데, 그 구체적 실체가 바로 설정식 시작(詩作)의 마지막 단계인 <제신(諸神)의 분노(憤怒)>의 세계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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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상현(呂尙玄)

본명 : 여상현(呂尙鉉)

여성야(呂星野)

1914년 전라남도 화순 출생

1935년 고창고보 졸업

연희전문학교 입학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등단

1939년 연희전문학교 졸업

해방 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월북

시집 : {칠면조(七面鳥)}(1947)


1936년 {시인부락} 동인으로 참여하면서 등단한 여상현은, 해방 이전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하다가 해방 이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현실 인식이 뚜렷한 일련의 시들을 발표하면서 뒤늦게 고평된 시인이다.

이 시는 {해방기념시집}에 수록된 작품으로, 해방의 감격을 어떠한 흥분도 없이 담담히 서술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그러나 시인 자신은 자신의 시집에서는 이 시를 해방 이전의 시와 함께 취급하고 있어서 창작 연대가 분명하지 않다. 만약, 해방 이전에 창작된 작품이라면, 이 시의 의미는 만주 유랑민의 소식을 전해받는 것쯤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시는 제목에서 보듯 어느 봄날의 '자는 듯 고요한 마을'의 풍경을 친근한 필치로 그려내고 있다. 1∼5연까지는 논, 연못가, 보리밭, 성황당을 배경으로 한 봄날의 한가하고 나른한 풍경이 계속된다. 각 연은 모두 2행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4연은 각 행마다 봄날을 맞는 동물과 인간의 행위를 병치시켜 놓아서, 봄날이 베풀어 주는 여유로움이 물아일체의 이미지로 제시되어 있다. 5연에서는 성황당이 지니는 기복(祈福)의 인간적 행위와 찔레나무의 순환적 질서가 맞물려 이러한 봄날의 표정이 해마다 반복됨을 암시한다. 이러한 여유로움은 마지막 6연에서 '느티나무 아래 빨간 자전거 하나'의 출현으로 갑자기 긴장감에 휩싸인다. 특히, 그 색깔을 봄날의 밝은 이미지 속에서 뚜렷이 눈에 띄는 '빨간'색으로 설정함으로써 그 돌연한 '무슨 소식'의 실체에 대한 기대감은 더욱 커진다. 분명 '자는 듯 고요한 마을'을 흥분으로 깨우는 어떤 소식이 온 것이 분명하다. 그 소식은 무엇인가. 비록 봄날이라는 시기가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소식을 '해방'의 메시지로 읽고 싶어지는 것이다.


이 시도 앞의 <봄날>과 매우 흡사한 구조를 지닌다. 1∼6연까지의 각 연은 모두 2행으로 구성되어 어느 여름날의 '고궁'[덕수궁]의 풍경을 그리고 있으며, 마지막 7연에 가서야 시적 자아의 모습이 분명히 드러난다. 한낮 '슬픈 역사가 / 오수에 잠긴 고궁'은 '홰를 치며 우는 / 닭의 울음이 어데서 들릴 것만 같'을 정도로 고요와 침묵에 빠져 있다. 그러나 이 침묵은 단순한 정밀감(靜謐感)의 이미지보다는 권태에 가깝다. '장(墻) 넘어 불타는 아스팔트 거리에는' 비록 '생활이 낙엽처럼 구르고' 있지만, '공위(共委) 휴회 후, 원정(園丁)은 때때로 먼 허공만 바라볼 뿐' 정원은 텅 비어 있다.

이러한 고궁의 권태를 깨뜨리는 동적인 이미지의 표상이 바로 분수이다. 시적 화자는 이 분수를 일러 '지열과 함께 맹렬히 뿜는 의분'으로 인식한다. 그것은 1947년 여름의 시점에 이르기까지 독립된 통일 민주국가의 성립에 대한 전망이 보이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대한 시인의 분노의 표상이다. 이러한 시인의 현실 인식은 '슬픈', '의분', '낙엽처럼', '텅 비인', '먼 허공' 등의 시어에서도 드러나지만, 마지막 연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노상 속임수 많은 여름 구름은 / 무슨 재주를 필 듯이 머뭇머뭇 지나'가는 한여름의 풍경 속에는 믿지 못하는 여름 날씨뿐 아니라, 짐작할 수 없는 요지경 정치판에 대한 시적 화자의 부정적 인식이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그는 '내 마음의 분수도 사뭇 솟구치려 하는구나'라고 하여 비로소 자신의 속내를 직접 내비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현실 인식에서 기인하는 시적 긴장도를 늦추지 않고 있으며, 평이한 시어의 선택과 단순한 구조 속에서 권태와 역동성이 뚜렷이 대비되는 이미지의 구사로써 탁월한 시적 형상을 성취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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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상훈(金尙勳)

1919년 경상남도 거창 출생

중동중학, 연희전문학교 문과 졸업

1946년 김광현(金光現), 이병철(李秉哲), 박산운(朴山雲), 유진오(兪鎭五)등과 {전위시인집}을 간행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6·25 당시 월북

시집 : {전위(前衛)시인집}(1946), {대열(隊列)}(1947), {가족}(1948)


김상훈은 경남 거창에서 태어나 18세까지 봉건적 서당 교육을 받다가 서울로 올라와서 근대적 교육을 받았다. 연희전문을 수료할 무렵 징용에 끌려가 원산 철공장에서 1년 반 동안 선반공으로 일하다가 돌아온 후 항일 투쟁에 가담하기도 한다. 해방 직후에는 잡지 {민중조선}의 편집을 담당하면서, 해방공간의 짧은 시기에 개인 시집 {대열}과 공동시집 {전위시인집}, 그리고 서사시 {가족}을 발간하는 등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한다. 그는 해방공간의 시인들 중에서 시에서의 리얼리즘 창조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 서사시 {가족}에서는, 시인 주위의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가식없이 시적 제재로 취급한다. <아버지의 창 앞에서>는 이러한 김상훈의 면모가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초기적 경향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그의 시는 공통적으로 대상에 가까이 가거나 몰입하여 그것을 주관화시키기보다는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시적 자아 자신마저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특징을 지니는데, 이 시도 이러한 공통적 특징을 여실히 보여 준다. 이 시의 화자는 공산주의자로서 '등짐지기 삼십리길 기어 넘어 / 가쁜 숨결로' 아버지를 찾는다. 그러나 '아버지의 창 앞에'는 '공산주의자는 들지 말라'는 '무서운 글자'가 있어 그는 차마 문고리를 잡아당기지를 못한다. 그리하여 시적 화자는 물끄러미 상념에 잠긴다. 기나긴 식민지의 질곡을 딛고 '이제 새로운 하늘 아래 일어서고파' 새로운 출발을 하려는데, '말 배울 적부터 정전법을 조술하'던 그의 아버지는 그의 공산주의적 활동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고 자신의 길을 선택한다. 그는 '지주의 맏아들로 죄스럽게' 사는 삶을 거부하고, '가야할 길 미더운 깃발 아래 발을 맞추'기 위하여 '붉은 기폭 나부끼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선택은 곧 아버지와 절연(絶緣)하는 길임을 자각한 시적 화자는, '아아 해방된 다음날 사람마다 잊은 것을 찾어 가슴에 품거니 / 무엇이 가로막어 내겐 나라를 찾든 날 어버이를 잃게 하느냐'라고 마음의 고통에 울부짖는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쓸데없는 '악몽'으로, 한가하게 상념에 젖고 있을 수만은 없다. 그리하여 그는 다시금 '벗아! 물끓듯 이는 민중의 함성을 전하라 / 내 잠깐 악몽을 물리치고 한걸음에 달려가마'라고 하여 아버지가 아닌 민중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평이한 서술과 독백체의 화법으로 아버지의 창 앞에서 느끼는 회한을 차분하게 풀어가고 있다. 그러한 점이 오히려 시적 화자의 삶의 선택의 길에 대한 설득력을 높여주고 있는 바, 이것이 바로 시인이 의도하는 시적 리얼리즘의 세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는 해방공간을 살아가는 고단한 민중의 삶을 노인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시적 화자의 시점에서 객관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작품이다.

노인들은 '석유를 그득히 부은 등잔' 아래서 밤이 깊도록 이야기를 나누지만, 모두 '죽구 싶다는 말 뿐이다'.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가고' '기운 센 아이들 노름판으로 가고'에서 보듯, 그들의 삶을 이끌어 줄 진취적인 힘은 이미 없다. 토지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아 소작농의 신세는 해방 이전과 마찬가지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애당초 누구를 위한 농사냐고' 하면서 '이박사의 이름을 잊으려 애'쓴다. '곳집에 도적이 들었다는 / 흉한 소문이 대수롭지 않'은 현실, 곳간에는 곡식이 쌓여 있지만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역설적 현실, '암탉이 알을 낳지 않고 / 술집이 또 하나 늘었고 / 손주 며느리 낙태를' 하는 비극적 현실하에 노인들은 잠을 이룰 수 없다. '잠들면 악한 꿈을 꾸겠기에 / 짚신을 삼아 팔아서라도 / 부지런히 석유만은 사' 와야 하는 모순적인 현실을 통해 시인은 은연중 자신의 정치적 색채를 드러낸다. 그것은 '이박사'로 지칭된 당대 우파적 정치 세력에 대한 비난이자, '쓸만한 젊은 것은 잡혀'갈 수밖에 없는 미군정 체제에 대한 비판이다.

이처럼 이 시는 매우 간략한 서술과 역설적 어법으로 일제 잔재·봉건 잔재의 청산이 이루어지지 못한 데에서 기인하는 민중의 고단한 삶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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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악(李庸岳)

1914년 함경북도 경성 출생

1935년 {신인문학} 3월호에 시 <패배자의 소원>을 발표하며 등단

1939년 일본 죠오지(上智)대학 신문학과 졸업

김종한과 더불어 동인지 {이인(二人)} 발간

1939년 귀국하여 {인문평론} 기자로 근무

1946년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

1950년 6·25 당시 월북

시집 : {분수령}(1937), {낡은 집}(1938), {오랑캐꽃}(1947), {이용악집}(1949)


1945년 겨울에 창작되고 네 번째 시집 {이용악집}에 수록된 이 시는 이용악의 시에서는 보기 드문 연가풍의 작품이다. 1939년 이용악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후, 최재서가 주관하던 {인문평론}의 편집 기자로 근무하다가 1942년 고향 경성(鏡城)에 돌아가 있던 중, 1945년 해방되자마자 귀경(歸京)하여 그 이듬해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게 된다. 이 시는, 해방 직후 혼자 상경하여 서울에서 외롭게 생활하던 그가 무산(茂山)의 처가에 두고 온 그의 가족들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자유시이지만, 의미상으로는 기·승·전·결의 전형적 형식에 수미 상관의 구조를 곁들인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연[기]에서 시인은 '북쪽 작은 마을'에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으며, 2∼3연[승]에서는 어느덧 시인이 상상의 날개를 펴고 북쪽의 가족을 찾아가는 모습이 제시되어 있다. 그 곳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 백무선 철길'을 이용해 '느릿느릿 밤새어 달려'야 다다르는 깊은 산골이다. 지금쯤이면 그 곳으로 향하는 화물열차의 검은 지붕에도 눈이 내릴 것이며, 가족들이 사는 작은 마을에도 눈이 내리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4연[전]에서 화자는 그들이 못견디게 그리워진다. 그러므로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이라는 시행의 '차마'라는 시어 속에는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 어쩌자고 잠을 깨어'라는 구절은 바로 시인이 머물고 있는 서울도 잉크병마저 얼게 할 정도로 추운데, 그 곳 무산의 가족들은 얼마나 추울까, 하는 화자의 가족들에 대한 염려가 잘 드러나 있다. 5연[결]에는 '북쪽 마을'에 함박눈이 쏟아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1연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묻는 단순한 질문이라면, 5연은 동일한 시행이면서도 시인의 그리움 내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 마침내 눈으로 화하여 쏟아져 내리는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해야 할 것은 잉크도 얼어붙게 할 정도의 추위를 몰아오는 '함박눈'임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그것을 '복된 눈'으로 생각하는 인식의 태도이다. 해방이 되자마자 그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가족들을 처가에 남겨 두고 상경하였던 그로서는 '눈'을 새 시대를 위한 하늘의 축복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 시는 '북쪽'에 두고 온 가족을 향한 그리움을 '함박눈'과 추위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으며, 잉크마저 얼어붙게 하는 모진 추위는 역설적으로 시인의 따뜻한 가족애를 보여 주는 소재로 사용되고 있다.


해방 이전 유이민들의 비극적 삶을 주된 제재로 하여 예술성 높은 다수의 작품을 형상화해 내었던 이용악이 해방 이후 갖게 된 관심사는 당연히 고국을 찾아 돌아오는 귀향 유이민들의 걬이었다. 이 시는 바로 해방을 맞아 비로소 고국으로 돌아오는 귀향 유이민의 모습을 통해 해방공간의 또 다른 비애를 보여 주는 작품으로, 화자는 그들 유이민 중 한 사람이다.

유이민들 중에는 '두만강 저쪽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 쟈무스에서 온다는 사람들과 / 험한 땅에서 험한 변 치르고 / 눈보라 치기 전에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 남도 사람들과' 시적 자아로 형상화된 '나라에 기쁜 일 많아 / 울지를 못하는 함경도 사내' 등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해방을 맞아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하여 제대로 된 객실을 얻지 못하고 고작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드러누워 서울로 향한다.

'갈 때와 마찬가지로 / 헐벗은 채 돌아오는 이 사람들'의 머리 위로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이 떠 있다. 그 많은 별들 만큼이나 많은 간난과 고초를 겪고 지금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지만, '헐벗은' 그들의 가슴을 달래 줄 어떠한 미래의 전망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내사 서울이 그리워 / 고향과는 딴 방향으로 흔들려' 가고 있는 시적 화자에게 이 여행은 앞으로 전개될 해방 정국의 험난한 파고를 예견하게 해 주는 또 다른 유랑의 의미를 지닌다. 그들 모두는 서로서로 '북어쪼가리 초담배 밀가루떡'을 나누어 먹으며 동질성을 확인하지만,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드러누워 있는 모두의 신세는 한결같이 처량하고 애처로울 뿐이다. 이용악의 시 <두만강 너 우리의 강아>(1938)에서 '죄인처럼 수그리고' 떠났던 그 '설움 많은 이민열차의 흐린 창으로 / 그저 서러이 내다보던 골짝 골짝'은 여전하고, 고향을 떠날 때나 돌아올 때나, 식민지 치하거나 해방된 조국 하늘 아래이거나, 이들 유이민들의 삶은 헐벗기는 마찬가지이다.

해방이 되어 조국이 환희에 잠겨 떠들썩할수록 그들의 비애는 상대적으로 크지만, 시적 화자는 '나라에 기쁜 일 많아' 차마 울지를 못한다. 오직 즐거울 수 있는 사람은 전쟁에서의 승리를 맛보고 점령군으로서 입성하는 '총을 안고 뽈가의 노래를 부르던 / 슬라브의 늙은 병정' 뿐이다. 그들 유이민 모두는 '바람 속을 달리는 화물열차의 지붕 위에' '제각기 드러누워' '한결같이' 하나씩의 별들을 쳐다본다. 그들은 희미한 별빛에 기대어 자신들의 불투명한 미래 속에서 '제각기'의 희망을 찾아보는 것이다. 과연 그들의 해방 조국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시는 이처럼 어둠과 빛, 유랑과 귀환의 이미지의 대비와, 수미상관식의 구조에 의한 시상(詩想)의 적절한 배치, 그러면서도 흥분하지 않는 감정의 절제를 통해, 해방의 감격 뒤에 놓여 있는 유이민들의 비애를 탁월하게 형상화한, 해방공간의 수작(秀作)이라 아니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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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오(兪鎭五)

출생 연도 및 출생지 미상

1940년 초반에 일본 문화학원을 다님

1946년 김상훈 등과 함께 {전위시인집} 발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활동

1947년 빨치산 문화선전대로 지리산에 들어감

1949년 10월 군법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후 감형되었으나,

그 이후 행적은 불분명함

시집 : {전위시인집}(1946), {창(窓)}(1948)


"시인이 되기는 바쁘지 않다. 먼저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어야겠다. 시는 그 다음에 써도 충분하다."고 유진오는 자신의 시집 {창}의 발문(跋文)에서 주장한 바 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입장과 투쟁 경력으로 인하여 흔히 그의 시는 정치성이 강하고 혁명적 사상성이 투철하다고 판단하기 쉬운데, 이러한 판단에 맞는 시는 주로 초기의 <장마>, <횃불>, <3·8 이남>,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 등의 작품들이 해당한다. 그는 1946년 <누구를 위한 벅차는 우리의 젊음이냐?>의 창작으로 인하여 1년의 감옥 생활을 겪는데, 그 이후에는 선전 선동적인 시들보다는 그러한 투쟁 의식이 한층 내면화된 한 차원 높은 시들을 창작해 내게 된다. 그리하여 자기 자신의 언급에 비추어 본다면, 오히려 그는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되지 못한 서정적 시인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불길>은 바로 그러한 그의 내면화된 투쟁 의지를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먼저 시적 화자는 어느 겨울 밤, '그리운 사람이 있음으로' '더 한층 쓸쓸해'짐을 느낀다. 그는 '퍽이나 무뚝뚝한 사나이'여서 가슴속의 말을 다 하지 못하고 '마음 속 숨은 불길'에 휩싸일 뿐이다. 그 때 마음 속의 불길은 하늘과 땅에 가득하고 이 마음을 알지 못하는 그리운 이까지 태울 수 있을 정도로 거세게 타오른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의 '쓸쓸하고 / 안타까운 밤은 숨막힐듯' 길기만 할 뿐이다. 시적 화자는 여기에서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는다. 그리하여 '불길이 스러진 뒤엔 / 재만 남을 뿐이라고 / 유식한 사람들은 말하'지만, 불길은 '돼지 구융같이 더러운 것'과 '징글맞게 미운 것들을 / 모조리 집어 삼키는' 것으로서, 단순한 개인적인 연정의 의미가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의 표상으로 승화된다. 시적 화자는 이러한 '신명나는 그리고 아름다운 / 불길을 사랑'하지만, 그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동시에 '두렵고 위험'하기까지 한 선택임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그 불길을 회피하는 것은 '싸늘한 이성 뒤에 숨은' '거짓과 비겁'의 행위여서, 그는 '젊은이 가슴에 손에 담겨서' '그득히 앞으로만 향해 가는' 투쟁의 의지를 새삼 불태운다. 그러나 그것은 외롭고 고독한 선택이고 '외곬으로 타는 마음'이어서 괴롭기도 한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불길'에 휩싸이는 것은 그의 '사랑'과 '자랑'인 것이다.

이처럼 이 시는 투쟁의 의지를 형상화하고 있으면서도, 그 속에서 느끼는 고독감과 괴로움을 솔직히 드러내 준다. 그러면서도 감상(感傷)과 흥분을 억제하면서 내면화된 의지를 가다듬는 성숙한 시인의 진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유진오의 마지막 창작으로 추정되는 작품으로, 그가 지리산에 문화공작대로 들어가서 지하운동을 하면서 느끼는 어머니에 대한 회한(悔恨)이 그의 투쟁 의지와 맞물려 적절히 형상화된 작품이다.

이 시는 그 의미 단락에 따라 두 부분으로 나뉘어질 수 있다. 전반부는 4연까지로 여기에는 주로 어머니에 대한 회한이 담겨 있다. 별빛 뚜렷한 어느 날 밤에 시적 화자는 그 별들을 바라보며, 지금 어디에선가 마찬가지로 밤하늘의 별들을 보면서 자식을 그리워하고 있을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는 자식 걱정에 '가슴 우에' 하얗게 '서리가 나'릴 것이지만, 자신은 그 어머니를 위해 아무 것도 해 드릴 수가 없다. 오히려 '총소리 엔진소리 어지러우면 / 파도처럼 철렁 / 소금먹은 듯 저려오는' 걱정만 끼쳐드릴 뿐이다. 늘 자식의 안위를 걱정하는 어머니는 사소한 소리에도 놀라 '이 녀석이 / 어느 곳 서릿 길 / 살어름짱에 / 쓰러지'는 것은 아닌지 가슴을 졸이는 것이다. 그러한 어머니에 대한 회한은 5연 이후의 후반부에서 '지열(地熱)과 함께 / 으지직 또 하나의 / 어둠을 바위처럼 무너뜨리'는 투쟁 의지로 승화된다. 시적 화자는 '손톱 밑 갈갈이 / 까실까실한' 어머니의 손을 자신의 가슴[창자]속에 꼭 담고, 그 거친 삶의 마디를 통해 승리의 의지를 가다듬는다. 그럴 때, '훌훌 뛰면서' 즐겁게 투쟁할 수 있고, 그러한 굳센 투쟁 의지에 '이빨'은 '사뭇 / 칼날보다 날카로워' 가는 것이다.

이렇듯 이 시에는 부모 처자를 버리고 입산하여 빨치산 활동을 선택한 당대 한 지식인의 회한과 의지가 애처롭게 표현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개인적 고뇌가 감상(感傷)으로 표출되지 않고 절제와 상징으로 내면화되어 있음은 오히려 그러한 지극한 서정을 극대화시켜 주는 효과를 얻는다. 이는 분명 시인의 미덕이지만, 그렇게 훌륭한 시인을 대다수 잃어버릴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시문학사의 현실은 분명 비극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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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병철(李秉哲)

출생 연대 미상

1946년 {전위시인집} 편집

조선문학가동맹 가담

6·25 이후 행방불명


해방공간의 좌익계 시단(詩壇)은, 과거 카프 계열의 시인군과, 1930년대의 정지용, 김기림, 김광균, 오장환, 윤곤강(尹崑崗) 등의 순수문학 옹호론자 혹은 모더니즘 계열의 시인들, 또 1930년대 중반부터 현실주의적인 시를 발표해 온 이용악, 여상현, 임학수(林學洙), 김조규(金朝奎) 등의 시인들이 중심이 되고, 여기에 김상훈, 박산운(朴山雲), 유진오, 이병철(李秉哲), 최석두(崔錫斗) 등의 신인들이 가세하여 형성된다. 이들 신진 시인들은 일제 말기부터 조금씩 작품을 발표하다가, 암흑기의 공백을 거친 후에 해방 직후 일제히 얼굴을 내밀기 시작한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친일이나 부일(附日) 문제에 있어서 떳떳할 수 있었기 때문에, 기성 시인들보다 훨씬 더 뚜렷한 정치 지향성을 지니고 활발한 창작 활동을 펴게 된다. 그 대표적인 성과물이 1946년 12월에 출판된 {전위시인집}으로, 여기에는 김광현(金光現), 김상훈, 박산운, 이병철, 유진오 등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는 이렇게 신인으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한 이병철의 대표 작품이다.

이 시는 그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어머니의 죽음을 맞아 그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조시(弔詩)의 성격을 지닌다. 이 시는 그 내용으로 보아 1∼6연까지는 어머니에 대한 회상을 담고 있고, 그 이후의 연에서는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토로하면서 그 슬픔을 이겨내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에서 묘사되고 있는 어머니는 우리 시골의 전형적인 어머니 상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 어머니는 '실컨 서울구경을 하시겠다는 어머니'이며,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는 것'만 알고 '열두대문집 마름살이'에 '느티나무처럼 늙은 어머니'이다. 그 어머니는 해방을 맞아 '인제사 좋은 세상 왔으니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서울 살겠다고, 서울에는 사래 긴 밭도 많고 논도 많은 줄' 알고 있고, 시적 화자에게 '어느 때 참말로 좋은 세상이 와서 참말로 기와집 한 채쯤 지니고 살겠느냐고 물으시던' 순진한 어머니이다. 그러면서도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으로 '상추쌈과 녹두랑 팥이랑 강냉이 당고추 같은 것이라든지, 봄철 들면 뿌려야 할 가지가지 씨앗을, 뜨내기 이불봇짐 속에 소중히 이어 오신 어머니'인 것이다.

이 시에서는 이러한 어머니의 형상을 통해 한편으로는 해방공간의 어수선한 상황과 그러한 현실 속에서 투쟁하는 시적 자아의 현실 의식을 은연중 드러내고 있다. 그 현실은 '멧돼지보다도 더한 등살', '왜놈들 가고 또더한 왜놈들 등살에 예나제나 상기도 쫓겨다니기만 하는 둘째', '쫓겨다니는 이 자식놈'에서는 비교적 직설적으로 드러나지만, '인제사 좋은 세상 왔으니', '어디메 살기 좋은 나라 살기 좋은 번지수' 등에서는 역설적으로 제시된다. 이와 함께 '왜놈들과 왜놈들의 붙이는 아주 사뭇 쫓아버리고' '어머니의 씨앗을 갈아 꽃 피우겠'다는 결연한 시적 자아의 투쟁 의지도 천명된다.

이 시에는 투쟁의 현장도 보이지 않고 격렬한 선동성도 없다. 그러나 어머니의 죽음이라는 서사적 사건을 시적 자아의 자각된 비애와 결합시켜 시인의 뚜렷한 목적 의식성을 드러내 주는 시적 기교는 해방공간의 시적 리얼리즘의 한 전범을 이룬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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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철수(金哲洙)

생몰 연대 및 활동 사항 미상

1930년 <처녀송(處女頌)>, <기적(汽笛)아 울지 말아라> 등의 시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 시작.

시집 : {추풍령(秋風領)}(1949)


이 시는 신진 시인 김철수의 대표작으로 뚜렷한 정치적 색채를 드러내지 않는 모더니즘 계열의 작품이다. 이 시는 '역마차'라는 이국적 제재를 택하여 1940년대 후반 분단이 고착화되는 현실에서 느끼는 비애를 시인 특유의 서정으로 노래하고 있다.

'설움 많은 밤' '반기어 주는 이 없는 폐도(廢都)' 서울에서 시적 자아는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 싶어서 '오늘도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린다. 비틀거리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은 과연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가. 그들에게 '열리는 아침'은 도래할 것인가. 미래에 대한 전망을 지닐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시적 자아는 '믿븐 사람'과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 자신의 희망은 역마차의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거운 꿈'에 불과한 것. 그래도 시적 자아는 어디에선가 자신의 꿈이 실현될 수 있을 것임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을 '역마야 너와 나는 원수이지 말자'라고 다짐한다.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 '폐도의 밤을' 가면서.

이처럼 이 시는 봉건 잔재와 식민 잔재의 청산이라는 민족사적 과제는 사라진 채 분단 현실이 고착화되어 버린 해방공간의 서울의 밤을 배경으로 하여, 삶의 어려움에 지친 민중들을 감싸고 위로하며 소중한 꿈으로 상승시키는 힘과 서정을 보여 준다. 바야흐로 혁명의 열기나 투쟁의 의지보다는 분단의 민족 현실에서 비롯되는 비애가 더욱 짙게 배어나기 시작하는 해방공간의 현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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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곤강(尹崑崗)

본명 : 윤명원(尹明遠)

1911년 충청남도 서산 출생

1925년 보성고보 편입

1928년 혜화전문학교 중퇴

1933년 일본 센슈(專修)대학 졸업

1934년 {시학} 동인

1934년 카프 2차 검거에 관련되어 피검, 12월에 석방됨

1945년 해방 직후 조선문학가동맹 가담

1950년 사망

시집 : {대지}(1937), {만가(輓歌)}(1938), {동물 시집}(1939), {빙화(氷華)}(1948), {피리}(1948), {살어리}(1948)


1930년대 카프에 가담하여 활동하기도 한 윤곤강은 해방 직후에도 진보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한 다수의 시를 창작한다. 이 시는 이 시기 윤곤강의 대표작이자 분단의 현실을 노래한 대표적 작품에 해당한다.

이 시는 그 제목에서 보듯 시적 화자가 지렁이로 되어 있다. 지렁이는 '어찌하여 한 가닥 붉은 띠처럼 / 기인 허울을 쓰고 태어났는'지 알지 못한다. 지렁이는 '나면서부터' '청맹과니'이고 '눈도 코도 없는 어둠의 나그네'로서 '지나간 날을' 모를 뿐 아니라 '닥쳐 올 앞날은 더욱 모'른다. '다못 오늘만을 알고 믿을 뿐이'다. 이러한 지렁이의 삶은 3연에서는 '더러운 쓰레기 속에 / 단 이슬을 빨아마시며 노래 부르'는 밤의 생물로, 4연에서는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의 생물로 형상화된다. 이렇게 생태적으로 묘사된 지렁이는 5연에서 비로소 인격화된 시적 자아로서의 주체를 지니게 된다.

'어느 거친 발길에 채이고 밟혀 / 몸이 으스러지고 두 도막에 잘려도' 지렁이는 '붉은 피 흘리며 흘리며' 죽지도 않은 채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살아간다. 일반적으로 지렁이는 '지렁이도 밞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에서 보듯 매우 무기력한 존재로 비유된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시 전편에서 형상화되어 있는 지렁이의 삶은 심지어 '꿈틀하는' 본능적 저항 의지도 없는 지극히 수동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외부의 거센 힘에 의해서 몸이 두 조각으로 잘려도 그저 '아프고 저린 가슴을 뒤틀며' 살 수밖에 없는 지렁이는, 시 말미의 첨기(添記)에서 보듯 '정해(丁亥: 1947)'년 여름의 우리 민족을 상징한다.

시인은 1947년 여름 '삼팔선을 마음하며' 지렁이를 본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두 동강으로 몸뚱아리가 잘려도 그것을 감내하며 살아가는 지렁이를 통해서 시인은 우리 민족의 처지도 그와 같음을 깨닫는다. 그리하여 시인은 자조적으로 우리 민족을 지렁이와 동일시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는 이 점에서 민족 모순, 분단 현실의 모순을 천박하게도 고작 지렁이의 삶에 비유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마도 이것은 그렇게 생경하고도 거친 비유를 사용할 정도로, 시인이 '아프고 저린 가슴'의 고통에 몹시 괴로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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