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전통시의 계승과 변모

'중앙문화협회'(1945.9.18), '조선청년문학가협회'(1946.4.4)로 이어지는 해방공간의 민족 진영의 문단의 구성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한국 근대시의 초창기부터 등장하여 활약한 시인들로 정인보(鄭寅普), 변영로(卞榮魯), 김억(金億), 박종화(朴鐘和), 홍사용(洪思容), 양주동(梁柱東), 이하윤(李河潤), 김광섭(金珖燮), 김영랑(金永郞) 등 당시 우리 문단의 원로에 해당하는 사람들이다. 다음 제2의 부류는 1930년대 후반 문단에 등장하여 가장 왕성하게 창작 활동을 펼치는 서정주(徐廷柱), 유치환(柳致環), 김달진(金達鎭) 등의 30대의 중견 시인들이고, 마지막은 조지훈(趙芝薰), 박두진(朴斗鎭), 박목월(朴木月), 이한직(李漢稷)등의 20대의 신인들이다. 이들 중 원로 시인들은 해방공간과 6·25를 거치면서 시작(詩作)을 중단하거나 납북되거나, 사망하여 시단(詩壇)의 중심은 자연스럽게 20, 30대의 젊은 시인들에게로 옮겨 가고, 다시 이들을 중심으로 1950년대 일군의 신인들이 등단하면서 6·25 이후의 한국 시단은 재편되어 오늘에 이르게 된다.

2장(章)에서는 이들 민족 진영의 시인들 중 1950년대 이후에도 계속하여 왕성한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여 한국 현대 시단의 원로로 대접받아 온 대표적인 시인들의 작품을 감상해 보기로 한다. 1950년대 이후 등장한 당대의 신인들이 이들 전통시인들을 극복하는 것을 자신들의 창작 활동의 동기와 정체성(正體性)으로 자부해 왔음을 상기한다면, 이들 전통시인들의 작품이 해방 이후에 어떻게 계승·변모되어 왔는지를 살피는 것은 매우 흥미 있는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김광균(金光均)은 1947년 <시를 쓴다는 것이 이미 부질없고나>라는 작품을 발표하는 것에서 보듯, 이후 거의 절필 상태에 처해 있다가 1980년대 이후 시작(詩作)을 재개하기도 하였지만, 이른바 생명파[인생파]와 청록파 시인으로 불리는 서정주, 유치환, 조지훈, 박목월, 박두진 등은 해방 이후에 더욱 왕성한 작품 활동을 전개하여 이후 한국 현대시의 중심으로서의 한 계보를 형성하게 된다.

서정주는 초기의 생명 탐구에서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관심 방향을 전환하면서, 슬픔을 넘어선 환희의 세계와 민족의 고유 정신을 발견하고, 고전적 소재를 취하면서도 현실 세계에서의 초월 의지와 절대적 가치에 대한 외경(畏敬)의 정신을 놓치지 않는 다양한 시 세계를 보여 준다. 유치환은 생명과 인생에 대한 의지의 표현이라는 해방 이전의 경향에만 머물지 않고, 일상화의 다양성 속에서도 현실 모순을 직시하는 현실주의적 시 세계를 일관되게 유지한다.

조지훈은 고전적 정신의 추구를 통해 해방 직후의 혼란을 극복한 후,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한 현실 인식의 일관된 어조를 지니는 지조의 시인이라 할 만하다. 박목월은 동양화의 여백과 향토적 서정이 조화된 간결한 형식미의 세계에서 일상적 삶의 문제로 관심을 전환하고, 동시에 역사적·사회적 현실과 사물의 본질 추구 등 지적 인식의 관념적 세계에까지 시적 긴장을 늦추지 않는 성숙한 시 정신을 보여 준다. 박두진은 비관적 현실 하에서도 좌절하지 않는 낙원 회귀의 강한 의지를 지니고, 현실적 상황과 그 극복의 문제에까지 관심을 기울여,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적 성향을 나타낸다.

이 밖에 박남수는 문명 비판의 주지적 경향과 함께 사물의 본질에 대한 탐구를 보여 주고, 김현승은 완숙한 서정성을 바탕으로 추상적 관념을 형상화하는 이미지시트의 면모를 지니며, 김광섭은 삶에 대한 자각을 통한 인간 본질과 순수 세계의 탐구로 관심의 폭을 넓혀간다. 이 외에도 신석정(辛夕汀), 김용호(金容浩), 신석초(申石艸) 등의 시 세계도 해방 이후 꾸준한 탐구와 모색의 치열한 시 정신을 보여 준다.

이들 시인들은 공통적으로 전대의 특정한 하나의 창작 경향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는 자기 탐구와 치열한 시 정신을 바탕으로 하여, 해방 이전과 1950년대의 시사(詩史)를 연결시켜 주는 가교(架橋)의 역할을 담당한다. 과거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거치면서 많은 시인들이 우리 문학사에서 사라져 갔음을 상기한다면, 이 시인들이야말로 해방과 전쟁의 혼돈을 극복하고 1950년대 이후의 시를 꽃피우는 정신적 지주(支柱) 그 자체였으며, 이와 함께 이들의 시가 한결같이 많은 독자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음을 상기한다면, 이들의 작품들이야말로 우리 문학사의 값진 자양(滋養)과 자부심의 결정체(結晶體)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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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광균(金光均)

작가 약력 - 1장 참조


이미지즘 경향의 회화적 수법을 앞세운 이전의 시들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김광균의 이 시는 자식 잃은 아버지의 뜨거운 부정(父情)을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점에서 이 시는 해방공간의 정치성 짙은 시들과는 달리 김광균의 시적 관심사가 다시 시인의 내면의 문제로 돌아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김광균이 문단에 처음 작품을 선보인 것은 불과 16세이던 1930년 동아일보 지면이었다. 그리고 첫 시집 {와사등}이 출간된 것이 25세 때인 1939년이고, 두 번째 시집 {기항지}가 나온 것이 33세 때인 1947년이었다. 결국 그는 서른 이전의 나이에 시인으로서의 확고한 위치를 한국 시사에서 확보했을 뿐 아니라, 해방을 전후해서 이미 시인으로서의 재능을 거의 소진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후 그는 시작 생활을 중단하고 실업계에 투신하여 역량있는 실업인으로 활약하다가 문단 고별 시집인 {황혼가}(1957)를 출간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30년이 지난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 생활을 재개하여 정지용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으나, 예전만큼의 주목은 받지 못하고 말았다.

이 시는 두 번째 시집 {기항지}에 수록되어 있지만, 후기 작품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기항지} 발문에 '내 나이 스물 여섯부터 서른까지의 것'이라고 기록된 것을 참고한다면, 이 시는 예전의 시와는 전혀 다른 경향의 작품으로 서른 이후에 창작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의 이 시는 화자인 아버지가 저녁을 먹으며 아이의 부재를 확인하는 것에서부터 한밤중에 만난 죽은 아이의 환영과 죽음의 세계로 떠나는 아이의 모습을 순차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이 시는 자식을 잃은 아버지의 슬픔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비통한 심경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시어는 '눈물' 하나밖에는 없다. 그러나 간결한 3연의 구성과 단문으로 행을 마감한 시 형식 속에는 자식을 그리워하며 피눈물을 흘리는 아버지의 아픔이 흠뻑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연은 화자가 저녁 식사 시간에 아이의 죽음을 확인하는 모습이다. 저녁 식사 시간, 화자는 문득 아이가 없음을 깨닫는다. 정말 죽은 것이 아니라, 잠깐 어디를 간 것이라고 믿어 왔지만, 저녁 밥상을 받고 아이의 빈 자리를 보며 그제서야 아이의 죽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리고는 아이의 방석에 놓인 주인 없는 '은수저'를 보며 화자는 눈물을 흘린다. '저무는 산'과 '잠기는 노을'은 하강·소멸의 이미지로서 아이의 죽음을 상징하며, 아기를 '애기'로 표현한 것에서 더 짙은 아버지의 정을 느낄 수 있다. 은수저는 '수복강녕(壽福康寧)'을 빌며 그가 아이의 돌잔치 때 선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화자는 그 은수저에서 더 깊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이다. '은수저'에서 '애기'를 떠올리고, 다시 그것은 '부정(父情)'으로 확대됨에 따라 마침내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2연은 한밤중에 화자가 아이의 환영(幻影)을 만나는 모습이다. 아이에 대한 그리움으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화자는 들창을 열고 바람 부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던 중, 불어 오는 바람과 함께 어디선가 방실방실 웃으며 방안을 들여다 보는 아이의 환영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화자가 반가와하기도 전에, 아이는 벌써 문을 닫고 총총히 사라져 버린다.

3연은 아이가 죽음의 세계로 떠나가는 모습이다. 화자는 '먼 들길'로 제시된 죽음의 세계로 '맨발 벗은' 채 울면서 가고 있는 '애기'를 목메어 부르지만, 아이는 '불러도 대답이 없'고 '그림자마저 아른거'릴 뿐이다. 천진난만한 모습이었던 2연의 '애기'가 3연에 와서는 사자(死者)의 모습으로 바뀌어 나타나 있다. 아무리 목메어 부르며 그리워하더라도 이젠 더 이상 이 곳 이승의 세계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아이임을 인정하고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드는 데서 진한 육친애를 느낄 수 있다. 정지용의 <유리창>과 동일한 소재를 다룬 작품이지만, <유리창>보다 화자의 감정이 보다 직접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별다른 수사적 기교 없이 평이한 서술로 아픔을 토로하고 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아픔이지만, 그것을 절제하고 여과하는 시인의 인간적 성숙도를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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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정주(徐廷柱)

미당(未堂), 궁발(窮髮)

1915년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 출생

1929년 중앙고보 입학

1931년 고창고보에 편입학, 자퇴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벽>이 당선

시 동인지 {시인부락} 창간

1946년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시분과 위원장직을 맡음

1950년 종군위문단 결성

1954년 예술원 종신 위원으로 추천되어 문학분과 위원장 역임

1972년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

한국현대시인협회 회장 역임

시집 : {화사집}(1941), {귀촉도}(1948), {흑산호}(1953), {신라초}(1961), {동천}(1969), {국화 옆에서}(1975), {질마재 신화}(1975), {노래}(1984), {이런 나라를 아시나요}(1987), {팔할이 바람}(1988), {산시(山詩)}(1991), {미당 서정주 시전집}(1991), {늙은 떠돌이의 시}(1993)


서정주는 해방 이후 제2시집 {귀촉도}를 간행하면서부터 초기의 악마주의적인 생리에서 벗어나 동양적인 사상으로 접근하여 영겁(永劫)의 생명을 추구하는 인생파의 시인으로 자리잡게 된다. <밀어>는 {귀촉도}의 첫머리에 실린 작품으로, 전대와는 다른 서정주의 제2기 시작(詩作)의 출발을 보여 준다. 이 시는 '꽃봉오리'로 상징된 아름다움과 기쁨으로 넘치는 생명 세계의 도래를 점층적으로 예찬하고 있는 노래이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감안해 볼 때, 그 생명 세계는 다름아닌 조국 광복의 세계로 짐작해 볼 수 있다.

화자는 먼저 '순이'·'영이'·'남'이라는 세 소녀를 부르는 것으로부터 시상을 전개시키고 있다. '순이'·'영이'는 산 사람들이고, '남'은 죽은 사람으로 모두 우리 민족을 대유하고 있으며, 세 소녀를 부르는 이유는 바로 '꽃봉오리'의 세계로 초대하고 싶기 때문이다. '꽃봉오리'는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을 열고 나와서 / 하늘가에 머무른' 아름다운 모습이다. '굳이 잠긴 잿빛의 문'이란 굳게 잠겨 드나들 수 없는 문으로 캄캄한 죽음의 세계로 통하는 문이며, 결국 일제 치하의 우리 나라를 뜻하는 것이다.

또한 '하늘가'는 '한없는 누에실의 올과 날로 짜 늘인 / 채일을 두른 듯 아늑한' 곳으로 아름답고 화평한 생명의 세계이며, 그 곳에서 '꽃봉오리'는 '뺨 부비며 열려 있'다. 소녀들이 오랫만에 만나 뺨 비비며 기뻐하는 모습과 살랑대는 봄바람에 춤추듯 흔들리는 '꽃봉오리'들이 어울려 정겹고 아름다운 이미지를 형성해 내고 있다. 오랜 세월 애타게 기다렸던 조국 광복을 맞이하는 환희의 모습이다. 그러므로 모진 추위와 눈보라의 기나긴 겨울을 지나 마침내 '꽃봉오리'는 세 소녀의 '가슴같이 따뜻한 삼월의 하늘가에'서 부끄러운 꽃망울을 열고 있으며, 평화롭고 기쁜 세상에 대한 확신에서 오는 안도의 숨을 비로소 내쉬고 있는 것이다.


가장 한국적인 시를 쓴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미당의 대표작이자 우리나라 현대시를 대표하는 명시의 하나이다. 국화의 개화(開花) 과정을 통하여 어떠한 생명체라도 치열한 생명 창조의 역정을 밟고 태어난다는 것을 선명히 보여 주는 이 시는 불교의 연기론(緣起論―因緣說)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떤 일이 발생한다고 할 때, 그것이 단독으로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며, 강한 힘을 부여하는 인(因)과 약한 힘을 보태는 연(緣)과의 상호 결합의 결과로 본다. 이 시에서도 국화 자체의 힘(因)과 소쩍새·천둥·무서리가 봄부터 가을까지 작용(緣)함으로써 국화가 꽃을 피우는 것이다. 여기서 국화는 모든 생명체의 대유이자, 나아가 생명이 그러한 아름다움으로 승화된 상태의 상징이며, 동시에 시적 자아의 '누님'과 같은 40대 중년 여인이 도달할 수 있는 원숙하고 평온한 아름다움의 상징이기도 하다.

원래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절개와 지조를 상징하는 꽃이지만, 이러한 관습적 상징의 차원을 넘어서서 시인은 생명 탄생의 고귀함과 원숙한 중년 여인의 불혹(不惑)의 미를 상징하는 창조적 상징의 차원으로 국화를 노래하고 있다. 이와 같은 함축미를 지닌 국화의 개화를 위해서 외적(外的)으로는 소쩍새의 울음·천둥· 무서리 등의 협동이 필요했고, 내적(內的)으로는 설움과 번민의 시련과 고통 등을 극복하는 것이 필요했다. 그런 과정을 통하여 국화는 마침내 아름다운 꽃 한 송이를 피우게 되는 것이고, 무수한 괴로움과 역경을 극복한 인간은 거울 앞에 앉아 조용히 자신을 투영, 성찰하는 완전한 모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초기시의 특징이던 생명 현상에 대한 강렬한 탐구가 끝나고 화해와 달관의 세계로 나아간 미당 시의 제2기 대표작이다. 광주 조선대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6·25 직후, 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가난으로 얼룩진 현실 속에서, 우뚝 서서 말없이 삼남(三南)을 내려다보고 있는 무등산의 높은 기개와 의젓한 자태를 보고 인간 삶이 배워야 할 하나의 모형으로 생각하고 이 시를 썼다고 전해진다.

미당에 의하면,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에 여름 무등산 같은 '우리들의 타고난 살결, 타고난 마음씨'는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의 생활 철학의 반영으로, 가난이란 그야말로 누더기 옷과 같이 우리를 간혹 초라하게 하기도 하고 불편하게 하기도 하지만, 인간의 본성인 순수성은 결코 덮어 가릴 수 없는 것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무등산이 '눈부신 햇빛 속에 갈매빛의 등성이를 드러내고 서'서 아름다움을 구현하여 보여 주듯이, 인간도 순수한 알몸 그 자체로 자신의 참다운 삶의 모습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푸른 산이 제 품에 영지와 난초로 대표된 기품 있는 꽃을 키우듯, 우리들도 비록 가난한 생활이라 하더라도 자식만큼은 지란처럼 고결하게 키워야 한다는 의연한 삶의 자세를 제시한 다음, 그런 생활 속에서도 끼니를 걸러야 할 정도의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때가 오면, 일손을 잠시 놓고 따뜻한 눈길을 서로 주고 받는 사랑과 신뢰로써 가난을 참고 견디라며 어느 부부(夫婦)에게 충고를 덧붙이는 자상함을 보여 준다.

그러다 마침내 두 사람이 고통스런 삶을 마감하고 '어느 가시덤불 쑥구렁에 놓일지라도', 그들 부부가 가난 속에서도 진정 행복했었음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그들 부부가 '옥돌같이 호젓이 묻혔다고 생각할' 것이며, 그들의 무덤가에 푸른 이끼가 자욱하게 덮여 그들의 죽음을 거룩하게 할 것임을 믿겠다는 것이다.

이처럼 시인은 어떠한 시련에도 굴복하지 않고 늠름하게 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는 무등산의 지혜를 가난으로 고통받는 우리 민족 모두에게 뜨거운 육성으로 권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무등산'의 '무등'(無等)은 등급이 없는 완전 평등을 이르는 불교 용어인 바, 이 작품을 통해 시인이 제시하고 싶었던 인간 삶의 궁극적 지표도 결국은 '무등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슬픔을 넘어선 삶의 환희를 노래한 작품으로, 제목인 '상리과원'은 '상리'라는 마을의 어느 과수원이란 뜻이다. 과수원의 만개한 꽃들을 소재로 한 이 작품은 우리의 삶이 힘겨움 속에서도 즐거울 수도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6·25 때 소위 자살 미수를 겪은 후 깨달은 바 있는 범신론적(汎神論的) 낙천주의와 만개한 과목(果木)에서 발견한 자연의 아름다움이 결합됨으로써 태탕(?蕩)한 봄과 같은 생의 기쁨을 토로하고 있다.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이지만, 5개의 형식 단락으로 이루어진 구성이므로 각 단락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단락은 과수원의 만발한 꽃의 모습을 '조카딸년과 그 친구들의 웃음판'으로 비유하여 순진무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출하고 있다. 2단락은 만발한 꽃을 찾아드는 온갖 새들과 꿀벌들의 모습을 통해 생동감 넘치는 과수원의 모습을 제시하고 있다. 3단락은 앞의 두 단락에서 분출되던 격정적인 호흡을 멈추고, 서경적 표현을 서정적으로 전환시켜 아름다운 자연과 합일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보여 주고 있다. '유두분면'이란 기름 바른 머리와 분을 바른 얼굴로 흔히 부녀자의 화장을 의미하지만, 여기서는 꽃의 아름다운 모습을 비유하고 있다. 4단락은, '우리가 항용 나직이 서로 주고받는 슬픔'이 자연 속에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달은 화자가 '우리 어린것들에게 설움 같은 걸 가르치지 말'아야 한다며 기쁨과 행복이 충만한 세상을 소망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마지막 5단락은 주제연으로, 깊은 밤이 오게 되면, '우리 어린것들에게' '제일 가까운 곳의 별'을 보여 주고, '제일 오랜 종소리'를 들려 주어야 한다며 현실을 극복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서의 꿈과 지혜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것에서 우리는, 화자가 현실을 낙관적으로만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어둠'으로 상징된 고통이 엄연히 존재하는 곳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의 창작 시기가 6·25 직후인 것을 고려한다면, 전후의 허무적이고 비극적인 현실 인식 태도를 불식시키고, 더 나아가 '상리과원' 같은 기쁨이 충만한 미래 지향적인 삶을 고취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이 시를 창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이 시는 광화문에서 광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민족의 고유 정신을 발견, 시화(詩化)한 작품으로 광화문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여 한국적 광명(光明)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북악산과 삼각산을 오누이에 비유함으로써 국토에 대한 혈연적 친근감과 다정함을 표현, 국토에 대한 사랑을 간접적으로 그려내고 있는 한편, '광화문'의 위치를 보여 주고 있다.

2연에서는 광화문의 숭고한 모습을 우리 민족의 광명 사상이 깃든 종교와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버선코와 지붕이 지나고 있는 전통적 곡선미와 결합시켜 그 자태가 의젓함을 표현하고 있다. 즉, '광화문'이라는 하나의 건축물에서 민족의 사상을 '광명'을 찾아낸 후, 그것을 전통적 곡선미와 결합시킴으로써 버선 끝을 뾰족하게 만들어 하늘로부터 오는 밝은 빛을 떠받들고 사는 우리 민족과 '날갯죽지'(양쪽 기와지붕)에 푸른 광명을 의젓하게 싣고 있는 광화문의 자태(姿態)를 예찬하고 있다.

3연은 2연의 부연 단락으로서 한국의 전통적인 미(美)를 하늘에 연결시켜 광화문 지붕 위에 그득히 고인 하늘을 노래함으로써 우리 민족이 평화를 사랑하는 순결한 민족임을 강조하고 있다.

4연은 광명과 평화의 사상을 지닌 광화문의 상징적 의미를 말한 부분으로, 우리 민족이 항상 어질고 고운 마음씨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 5연에서 시정의 노랫소리는 아직도 옛 노래처럼 정겹게 들리고, 문득 고개를 돌려 바라본 낮달 또한 옛 하늘에서 보던 대로 여전히 하나의 신비스런 존재로서 우리 민족에게 광명의 대상으로 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춘향(春香)의 말'이라는 부제가 붙은 3편의 연작시 중, 첫 번째 작품으로 나머지 두 작품은 <다시 밝은 날에>와 <춘향 유문(春香遺文)>이다.

이 시는 대수롭지 않은 소재를 이용하여 그것을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인 세계로 끌어 올려 차원 높은 이미지로 승화시키는 미당의 시작 능력(詩作能力)이 발휘된 작품으로 시적 화자는 바로 춘향이다. 이 시에서의 '춘향'은 시인에 의해 새로이 성격화된 인물로서, 소설 '춘향전'의 중심 테마인 '춘향의 정절(貞節)'이라는 측면에 국한해서 이 시를 감상한다면, 시인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면으로 이해하게 되는 실수를 범하게 될 수 있다.

'춘향'은 낮은 신분에서 오는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답답한 심경으로 그네를 타며 '향단'에게 자신의 괴로움을 고백, 토로하는 삶의 고뇌를 갖고 있는 여인이다. 물론 춘향전에 의하면 이 장면은 춘향과 이몽룡이 만나기 이전으로 소설에서는 '춘향'이 그네를 타면서 하는 생각이 전혀 언급되고 있지 않지만, 시인은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그럴듯하게' 만들어 놓았다. 현실적 고뇌를 가진 '춘향'은 그네를 타는 행위를 단순한 유희가 아닌 땅 위의 현실적 인연을 끊어 버리고, 높은 하늘로 날아 오르려는 상징적 행동으로 생각한다. 현실을 떠나고 싶은 욕망과 의지는 '머언 바다로 / 배를 내어 밀듯이' 그넷줄을 밀어 달라는 '춘향'의 말로 나타난다. 그러나 아주 내어 밀듯 그네를 밀어 달라고 하지만, '수양버들'·'풀꽃데미'·'나비'·'꾀꼬리' 들로 표상된 아름다운 현실 세계에 대한 강한 집착 때문에 쉽게 떠나지 못하는 번뇌가 있다. 현실이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굳이 떠나려 하는 것은 자신의 소망을 이룰 수 없는 현실의 한계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춘향'은 좌초와 충돌, 곧 어떠한 제약도 없는 '산호도 섬도 없는 저 하늘'인 동경의 세계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욕망에 견딜 수 없어 이 고뇌에 찬 세상을 '채색한 구름같이' 벗어나 마음껏 자유를 누리는 초월적 세계 속의 존재가 되도록 '밀어 올려' 달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춘향'은 인간의 한계에 대한 현실적 깨달음을 얻고는 이내 '서으로 가는 달같이는 / 나는 아무래도 갈 수가 없다' 라는 독백을 한다. 그네가 아무리 하늘 높이 올라가더라도 다시 땅으로 떨어지게 마련인 것처럼 자신의 소망도 결국은 이룰 수 없다는 자각(自覺), 이것이 바로 춘향의 간절한 초월의 의지와 그것의 필연적 좌절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소망을 끝내 버릴 수 없어 '바람이 파도를 밀어 올리듯이' 밀어 달라고 한다. 파도가 어쩔 수 없이 다시 떨어져 내려 오듯이 자신도 그렇게 될 수밖에 없음을 분명히 깨닫고 있으면서도 그녀는 이 현실적 괴로움에서 벗어나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시는 '춘향'이라는 인물을 통해 현실을 초극하려는 의지와 현실에 대한 애착, 그리고 현실적 불가능 사이에 놓인 인간의 심리적 비극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사랑을 통한 초월에의 의지와 현실적 존재 조건에 의해 그 꿈을 포기, 좌절해야 하는 '춘향'의 상황을 통해 인간의 의식 구조를 해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춘향이가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뒤에 재회의 날을 간절히 소망하며 자신의 사랑을 굳게 지키겠다는 의지를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기·승·전·결의 전통적 구성 방식에 향토적 색채의 시어와 높임법의 문장를 구사함으로써 더욱 절절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1연은 춘향이가 '그'를 만나기 이전의 심리 상태를 보여 주고 있다. '처음 내 마음은 수천만 마리 / 노고지리 우는 날의 아지랭이'였으며, '번쩍이는 비늘을 단 고기들이 헤엄치는 / 초록의 강 물결 / 어우러져 날으는 아기구름' 같다고 함으로써 사랑의 격정에 휩싸이기 이전의 평화롭던 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연은 '그'를 만난 이후, '미친 회오리바람'과 '벼랑의 폭포'와 '소나기비'와 같은 열정에 빠진 자신의 심리를 나타내고 있다. 3연은 이별의 아픔을 겪은 후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그 훠 ― 遁한 내 마음에'는 아직 '마지막 타는 노을'같이 뜨거운 사랑이 타오르고 있지만, 재회를 기다리는 그 하루하루는 마치 '기인 밤'과 같다는 화자의 애절한 고백을 통해 이별을 겪은 후의 아픔을 잘 보여 주고 있다. '그'가 떠나간 것은 단순히 '그'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바닷물이 작은 여울을 마시듯' 신령님께서 데리고 간 것이라는 구절은, 화자가 운명론적 인생관을 가진 존재임을 알게 해 준다. 4연은, 화자가 '도라지꽃 같은 사랑'을 지키며 '또 한번 내 위에 밝는 날'로 표상된 재회의 날을 기다리겠다는 화자의 굳은 결의를 보여 주고 있다. 물론 이 결의는 '정절(貞節)'이나 '열녀불경이부(烈女不更二夫)'와 같은 봉건적 윤리관의 반영이 아닌,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시공을 초월해 존재하는 춘향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이 시는 죽음을 앞둔 '춘향'이가 옥에 갇혀 학수 고대(鶴首苦待)하는 이몽룡에게 남기는 유서 형식의 작품으로 시공을 초월한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부드러운 독백 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여성적인 섬세함과 부드러움 속에 강렬한 영상을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1연은 임에게 하는 체념적 인사이고, 2연은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회상과 함께 '무성하고 푸르던 나무' 같은 열렬한 애정을 표현한 부분이다. 3연은 멀고 먼 저승도 자신의 사랑보다는 가까이 존재한다고 하며 죽음의 세계까지도 그녀의 사랑 속에 있음을 강조하는 부분이다. 4연은 생사(生死)와 시공을 초월하는 자신의 사랑을, 지옥에 떨어져 썩은 물로 흐르거나 극락에 올라 구름으로 떠 있다 해도 결국은 도련님 곁이 아니겠느냐는 반어적 의문 형식으로 극대화시키고 있다. 그리고 5연에서는 하늘에 뜬 구름이 소나기가 되어 내려올 때, 자신도 함께 그 곳에 있을 것이라는 영원 불변의 사랑을 다시금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이 시는 윤회 전생(輪廻轉生)에 의해 '검은 물' → '구름' →'소나기'로 춘향을 변신시켜 결코 소멸하거나 중단되지 않는 그녀의 영원한 사랑을 불교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 시는 {삼국유사}에 실려 전하는 '사소 설화'를 변용하여 구도자(求道者)의 신앙적 염원인 영원한 절대 세계에 대한 열망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사소'는 신라 시조인 박혁거세의 어머니이다. 그녀는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神仙修行)을 떠난 일이 있는데, 이 시는 집을 떠나기 전, 집 꽃밭에서의 독백을 시화한 것으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과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깊이 인식한 '사소'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어 인간의 부활을 갈망하는 구도적 정신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전 14행의 단연시로 내용상 3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인간 세계의 유한성을 제시하고 있다. 노래가 좋기는 가장 좋아도 그 소리는 구름까지 갔다가는 돌아올 수밖에 없고, 힘차게 달리는 말도 바다에 이르면 멎을 수밖에 없음을 인식하게 된 화자, 즉 '사소'가 산돼지나 산새들에게 입맛을 잃어버렸다는 독백을 통하여 인간 세계의 유한성을 말하고 있다. 2단락은 7∼11행으로 자연과 동화될 수 없는 인간 본질의 한계성을 드러내고 있다. 핵심적 이미지인 '개벽하는 꽃'은 소멸과 생성, 죽음과 부활이 반복됨으로써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 화자는 '꽃'으로 상징된 자연의 세계, 곧 영원의 세계에 합일되려 하지만, 결국은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인 자신의 한계만을 자각할 뿐이다. 다시 말해, 신선이 되고 싶어하는 '사소'는 열심히 선(仙)의 세계를 꿈꾸고 있으나, 그 때마다 영원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성을 확인하고 절망하는 것이다. 3단락은 12∼14행으로 영원의 세계를 갈망하는 화자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벼락'과 '해일'은 영원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화자가 극복해야 할 온갖 고통이나 형벌을 의미하며,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는 주술적 성격의 반복되어 나타나는 절규 속에는 영원의 세계를 향한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바로 현실 세계의 대지적 존재를 벗어나 영원한 세계로 상승하고자 하는 화자의 희원(希願)이자, 결국은 이 시의 작자, 미당의 희원이기도 하다.


3음보 율조의 5행 한 문장으로 된 이 시는 짧은 형식 속에 인간의 본질과 의미라는 무게 있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일체의 설명을 배제하고 고도의 상징적 수법을 구사함으로써 강렬한 언어적 긴장을 이루고 있는 차원 높은 시가 되었다.

싸늘하면서도 유리같이 투명한 겨울 밤하늘 '동천(冬天)'에 초승달이 떠 있고, 그 한켠에 한 마리 '매서운 새'가 날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전부이다. 이 시는 화자의 행위를 나타내는 1∼3행까지의 전반부와 그에 대한 반응, 즉 새의 행위로 나타나는 반응인 4∼5행의 후반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행의 '고운 눈썹'은 초승달을 의미한다. 이 초승달이 화자의 마음 속에서 천 년 동안 맑게 씻긴 것임을 고려한다면, '눈썹'은 곧 사랑의 표상이다. 2행의 '즈믄 밤의 꿈으로 맑게 씻'는 행위는 지금까지 겪어온 온갖 모순과 갈등을 투명화하는 작업을 의미하며, 3행의 '하늘에다 옮기어 심어 놨더니'는 절대적 경지로 비약하려는 행위로, 보다 가치 있는 삶을 지향하는 화자의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 4행의 '매서운 새'는 공격적 특성을 환기하는 시어로 차가운 겨울 밤하늘과 어울려 그 '매서움'이 배가되고 있다. 그러나 '매서운 새'는 달과 조화를 이룸으로써 5행의 '그걸 알고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유순함으로 나타난다. 결국 새는 달을 공격하지 않는, '매서움'으로서의 특성이 나타나지 않는 존재인 것이다.

그렇다면, 동지 섣달의 밤하늘을 날며 '시늉하며 비끼어 가'는 '매서운 새'는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이 시의 평면적 의미는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하고 있는 임의 고운 눈썹을 천 년 동안 마음 속에 아로새겨 하늘에 옮기어 놓았더니, 동지 섣달 하늘을 나는 매서운 새가 눈썹의 절대적 가치를 알고 비끼어 간다.'는 것이다. 여기서 '고운 눈썹'인 초승달이 '즈믄 밤의 꿈'으로 이어지는 것은 초승달이 여러 차례의 변신을 통해 최종 단계인 '만월'에 다다르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초승달은 화자가 염원하는 동경과 구도의 상징물로서, 그가 추구하는 어떤 절대적 가치를 '임'(절대적 대상) → '초승달'(미완성의 상태) → '만월'(완전한 영원의 세계)의 순서로 전개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매서운 새'는 '만월'인 영원의 세계를 동경하는 인간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매서운 새'가 현실 세계인 '동천'에 존재하며 끈질기게 영원의 세계인 '만월'에 접근하려고 노력하지만, 결국은 '시늉하며 비끼어'가는 한계에 부딪치고 말 뿐이다. 이렇게 이 시는 절제된 시어와 짧은 형식을 통해 절대적 가치에 대한 외경(畏敬)의 정신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혼인 첫날밤에 생긴 오해로 인해 신부가 40∼50년을 첫날밤 모양 그대로 앉아 있어야 했고,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재가 되어 내려앉았다는 비극적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신비주의적인 내용에다 다분히 관능적인 소재를 다루고 있어 읽는 즐거움을 주기도 하지만, 결국은 재가 되어버리는 신부의 비극으로 인해 그저 웃어 버릴 수만 없게 만든다. 또한 40∼50년 동안 신방을 기다리고 있던 신부에게서 고전적 절개를 엿볼 수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신부의 수동적이고 침착한 기다림과 신랑의 조급성이 대립됨으로써 처절한 비극이 유발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옷자락이 돌쩌귀에 걸린 것을 신부가 음탕해서 잡아당기는 것으로 오해한 신랑에게 신부는 40∼50년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저항으로 맞서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기다림은 자기 소멸이라는 더 큰 비극을 가져오게 된다. 다시 말해, 신랑은 자신의 성급하고 지각없는 판단으로 인해 신부를 소박한 채 40∼50년을 철저히 잊어버리고 지냈지만, 그 무관심은 신부를 죽음으로 몰고가는 비극을 탄생시킨 것이다. 40∼50년이란 그 긴 세월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며, 우연히 들른 신랑의 손길이 닿고서야 '매운 재'로 내려앉는 신부의 소리없는 반항이 나타나면서 비로소 신랑은 '안쓰러운' 뉘우침의 감정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록 재'와 '다홍 재'는 신부의 영적 존재의 아름다움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작품을 한 차원 상승시키는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철저한 속물적 근성의 신랑에 대비되는 신부는 전통적인 윤리관을 대변하는 '일부종사(一夫從事)'라는 현세적·육체적 세계를 초월하는 영적(靈的) 존재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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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치환(柳致環)

청마(靑馬)

1908년 경상남도 통영 출생

1927년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

1931년 시 <정적>을 {문예월간}에 발표하면서 등단

1937년 문예 동인지 {생리} 발행

1946년 청년문학가협회 회장 역임

1947년 제1회 청년문학가협회 시인상 수상

1957년 한국시인협회 초대 회장

1967년 사망

시집 : {청마시초}(1939), {생명의 서}(1947), {울릉도}(1948), {청령 일기(??日記)}(1949), {보병과 더불어}(1951), {예루살렘의 닭}(1953), {청마 시집}(1954), {제 9시집}(1957), {유치환 시초}(1958), {유치환 시선}(1958),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1960), {미루나무와 남풍}(1964)


이 시는 청마의 시에서 흔히 보게 되는 어떤 사상성이나 인생의 문제를 다룬 것이 아니라, 울릉도라는 하나의 섬을 통하여 국토와 조국에 대한 그의 강렬한 사랑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민족 공동체를 이루는 한 구성원으로서의 시인은 국토의 일부분인 울릉도에 감정이입하여, 섬의 외로움과 본토(本土)에 대한 그리움을 탁월한 상상력으로 그려내고 있다.

'장백의 멧부리'인 '백두산'으로부터 시작된 조국 강토가 '울릉도'라는 막내로 마무리되었다는 울릉도의 형성 과정을 말한 1·2연에 이어 3·4연에서는 '창망한 물굽이'로 인해 근심스레 떠 있는 울릉도의 가냘픈 모습과, 항상 '사념의 머리를 곱게 씻고' 있는 울릉도의 가냘픔과 경건함을 보여 주고 있다. 5·6연에서는 본토에 대한 그리움이 마침내 조국애로 승화되어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혼란하기만 했던 해방 직후의 어지러운 정국에 대한 안타까움을 노래하게 된다.

울릉도를 소재로 하여 애국심을 고양시키고자 한 것이 시인의 의도라 하더라도, 이 시는 관념적인 차원에 머물고 만 느낌을 준다. 그것은 청마 시의 특성에서도 기인되겠지만, 직접적인 울릉도 체험 없이 다만 지도책만 펴 놓고 시를 쓴 데 그 가장 큰 원인이 있을 것이다.


이 시는 허무의 극복이라는 의지의 문제가 아닌, 존재의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정념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일반적인 청마시와 많은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 어찌보면 감상적이고 애상적인 센티멘탈리즘에 휩싸인 사춘기적 연정을 노래한 듯한 이 시는 진정한 행복의 가치는 사랑을 받는 것보다 주는 것에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통해 지극히 순결한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이 시를 통해 현실에 만연되어 있는 이기주의, 자기 중심적 사고에 의해 사랑을 주기보다 받기를 원하거나, 먼저 사랑하기를 꺼리는 그릇된 풍조에 참사랑의 경종을 울려 주고 있다.

이 시는 수미상관식 구조에 의해 의미를 강조하는 한편, 청마 특유의 관념적, 남성적 시어를 철저히 배제시키고, 부드러운 정감이 넘치는 여성적 시어만을 구사함으로써 주제를 효과적으로 형상화시키고 있다. 1연에서는 주제에 해당하는 명제를 모두(冒頭)에 제시함으로써 '너'에게 편지를 쓰는 행위뿐 아니라, 그 사연까지도 밝고 아름다운 것임을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있다. '에메랄드빛 하늘'이라든가 '환히 내다뵈는'이라는 구절은 바로 이러한 화자의 행복한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2연에서는 우체국에 와서 편지를 부치거나 전보를 치는 사람들을 각기 다른 표정을 통해 화자가 자신의 사고와 행동에 객관성을 부여하고 있다. 우체국에 온 사람들은 사랑을 받기보다는 사랑하는 편에 서 있는 이들이란 것이 화자의 생각이다. 3연에서는 화자가 '너'와의 애틋한 연분을 밝히고 있다. 그 연분은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 더욱 더 의지삼고 피어 헝클어진 인정의 꽃밭'에 피어난 '진홍빛 양귀비꽃'과 같다는 표현으로써 그 연분을 승화시키고 있다. 사랑은 고단한 현실을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필요한 법이고, 그러한 사람들 사이에서 피어난 애틋한 사랑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이다. 4연에서는 1연에 내세운 명제를 다시금 반복함으로써 사랑받기보다 사랑하는 것의 소중함과 행복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


생명과 고독, 허무 등의 문제를 많이 다룬 탓에 '의지의 시인' 또는 '비정(非情)의 시인'이라 불리는 유치환의 일반적인 작품들과는 상당히 거리가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시는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담담한 어조로 1950년대 헐벗은 우리 농촌의 저녁 풍경을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엔 고통스런 농민들을 따뜻이 바라보는 시인의 애정이 듬뿍 배어 있다. 아울러 농촌의 궁핍화 원인이 농촌 내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모순이라는 외부 조건에 있다는 정확한 진단은 그의 투철한 현실 인식을 잘 알게 해 준다.

농촌은 자연과 싸우며 곡식을 길러내야 하는 육체적 고통이 있고, 도시에 비해 훨씬 불리한 사회적 문화적 조건을 극복해야 하는 정신적 고통이 있다. 특히, '보릿고개'라는 춘궁기까지 해마다 거쳐야 했던 1960년대까지의 우리 농촌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궁핍을 겪어야 했었다. 오늘날에야 '보릿고개'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물질적 풍요 속에서 사는 세상이 되었지만, 끼니 걱정을 한 번이라도 경험해 본 독자라면 이 시에서 말하고자 하는 시인의 의도를 충분히 헤아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시는 2행 1연의 5연 구성으로 의미상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먼저 1연은 저녁놀의 모습으로 작품의 배경이 된다. 그러나 이 '저녁놀'은 그저 단순한 아름다움의 대상이 아니라, '굶주리는 마을'과 대조되어 농촌의 궁핍화 현상을 강조하고 있다. 2·3연에서는 헐벗은 농민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끼니를 마련하지 못하는 마을에는 깨끗이 씻어낸 것처럼 어느 집이건 연기가 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어린이와 노인들은 배고픔을 잊기 위해 놀이 물든 초저녁부터 잠자리에 든다. 어른들은 '끼니를 놓으니 할 일이 없어' 집 밖으로 나와 저녁놀을 바라본다. '참 고운 놀'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들에게는 우울하고 서글픈 놀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저녁놀을 바라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4연은 바로 농민들이 하는 탄식으로 농촌의 궁핍화 현상의 원인을 제시하고 있다. '원도 사또도 대감도 옛같이 없잖아 있'다는 그들의 탄식은 농민을 수탈하고 억압하는 벼슬아치들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시인은 궁핍의 원인을 여기에서 찾고 있다. 게다가 '거들어져 있'는 관리들의 거들먹거림으로 인하여 더욱 고통스러운 농민들의 괴로움도 놓치지 않고 있다. 농민들의 배고픔은 도외시한 채 거들먹거리기나 하는 위정자들의 모습에서 조상 대대로 헐벗을 수밖에 없었던 농민들의 고통을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5연에서는 저녁놀의 의미를 제시하고 있다. 그와 같은 고통 속에서도 농민들은 자신들을 수탈하는 위정자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소리 없는 백성'이 되어 자신의 운명만을 탓하며 살아갈 뿐이다. 일찍 잠자리에 든 어린이·노인의 경우나, 저녁놀만 물끄러미 바라보는 어른의 경우나 할 것 없이 배가 고파 말할 힘도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농민들은 배고픔을 잊게도 해 주고, 자신들의 야속한 운명을 하소연할 수도 있게 해 주는 저녁놀이야말로 마치 하늘이 보내준 고귀한 선물이 아닐까 생각하는 것이다. 아무리 아름다운 시 한 편도 굶주린 사람에겐 아무 소용없는 것처럼 '화안히 곱기만 한 저녁놀'도 농민들의 배고픔을 면하게 해 주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늘의 선물'이라고 여기던 당시 농민들의 고통이 어떠했을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시는 1960년 3·15 부정 선거를 통해 영구 집권을 획책하던 이승만 독재 정권 말기에 씌어진 작품으로, 청마의 투철한 현실 인식과 함께 시인에게 부여된 대역사적, 대사회적 책무를 제시하고 있다. 3·15 부정 선거란 당시의 집권당이었던 자유당이 집권 연장을 위하여 경찰과 공무원, 심지어는 조직 폭력배까지 동원하여 이승만과 이기붕을 각각 대통령·부통령으로 당선시켰으나, 결국 4·19 혁명을 유발했던 우리 선거사상 그 유례를 찾아 보기 힘든 부정이 자행된 선거였다. 이와 같은 자유당 말기의 어지러운 세태 속에서 청마의 시는 그간의 사유와 관념을 버리고 현실 문제와 직접적으로 부딪히기 시작하였다. 그러한 현실 인식이 바로 이 작품의 저항적 색채와 자기 다짐의 강건한 어조를 통해 나타난 것이다.

먼저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뜨거운 노래'는 1·3연에서 제시된 것처럼 '욕되지 않은 고독을 / 견디는 이의 값진 영광'이며,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으로, 그것은 다름아닌 부정한 사회에 대한 시인의 분노라 할 수 있다. 그것이 다시 '나의 이름은 나의 노래'라는 명제와 결합됨으로써 화자는 지조와 정의에 대한 뜨거운 결의를 불태우는 한편, 자신의 이름에 조금도 부끄럽지 않은 시인이 되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라는 시제(詩題)는 불의와 타협하지 않겠다는 시인의 다짐일 뿐 아니라, 활화산처럼 터져 나오는 정의와 진실의 시로써 '겨울'로 상징된 암울한 현실의 '땅'을 녹여 버리겠다는 결의로 볼 수 있다.

1연에서 화자는 지조를 지키고 사는 자신의 긍지를 표현하고 있다. 부정과 불의에 협력하지 않음으로써 권력과 부귀, 영예로부터 멀어진 이의 고독은 욕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값진 영광이라고 인식하는 화자에게서 우리는 지조 높은 선비의 곧은 정신을 읽을 수 있다. 2연에서는 부정한 현실을 제시하고 있다. '요조턴 빛깔'과 '설레이던 몸짓'은 일체의 희망을 뜻하며, 그것들이 사라져 버린 '겨울의 숲'은 자유당 정권하의 암담한 현실 상황을 상징한다. 일제의 강점과 좌우 이념의 대립으로 인한 혼란, 동족 상잔의 비극과 남북 분단 등 노도(怒濤)와 같이 밀려온 엄청난 시련의 역사를 겪으면서도 우리 민족은 잠시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왔음을 상기하는 화자는 '먼 한천 끝까지 잇닿아 있'는, 이 '앙상한 공허'의 현실 상황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응시하기에 이른다. 그리고는 불의와 부정이 횡행하는 사회일수록 지조를 지키는 것이 더욱 영광스럽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화자는 그 깨달음을 '마음 고독한 자의 거닐기에 좋아라'라는 구절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3연은 주제연으로서 현실 상황을 '진실로 참되고 옳음이 / 죽어지고 숨어야 하는 이 계절'이라는 구체적 표현을 통해 제시하는 한편, 그 같은 현실에 '뜨거운 노래'를 하나의 밀알처럼 묻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다. 4연은 3연의 부연으로서, '뜨거운 노래'의 의미를 '목숨보다 귀하고 높은 것'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5연에서는 어떠한 고문(拷問)에도 꺾이지 않을 '뜨거운 노래'를 통해 자신의 지조와 정의에 대한 결의를 다시금 다짐하고 있다. 정신보다 약한 육신은 '눈을 에이고, 땅바닥 옥엔 / 무쇠 연자를 돌리'는 고통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지라도, 올곧은 정신에서 탄생하는 자신의 진실된 시는 일체의 비도덕적인 것을 장식하는 데에는 빼앗기지 않을 것임을 말함으로써 정직하지 못한 권력에 야합하거나 그것의 시녀로 추락하지는 않겠다는 맵찬 각오를 보여 주고 있다.

6연에서는 '거짓의 거리'라는 현실 상황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온갖 비리를 고발하고 있다. 그것은 자유당을 지지하는 관제데모대의 '뭇 구호'이며, 지조를 버리고 권력에 매수된 자들이 아첨하는 '빈 찬양'으로, 화자는 이것을 영혼을 팔아치운 자들의 '헛한 울림'이라고 비판하고 있다. 7연은 3연의 주제행을 반복한 것으로, 언 땅을 녹여 만물을 소생시키는 빗물처럼 화자의 노래도 동토(凍土)의 현실 속으로 스며들어 소망스런 세상을 이루겠다는 결의를 불태우고 있다. 이것은 청마 혼자만의 다짐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민족과 역사를 위한 시인의 역할이 무엇인지 많은 문학인들에게 장엄한 목소리로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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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지훈(趙芝薰)

작가 약력 - 1장 참조


고전적인 정신의 추구를 내세우면서 해방 직후의 혼란을 헤쳐나온 조지훈은 절제와 균형과 조화의 시를 통해 자연을 노래하고 자기 인식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전쟁의 고통 속에서 사회적 현실에의 관심을 더욱 확대하고 있으며, <다부원(多富院)에서>와 같은 총체적인 상황 인식의 가능성을 작품을 통해 시험하기도 한다. 그러나 조지훈은 자연을 노래하거나 지나간 역사를 더듬거나 간에, 또는 현실을 바라보거나 자기 응시에 몰두하거나 간에 언제나 비슷한 어조를 지키며 커다란 변화를 보이지 않는다.

이 시는 그의 첫 시집 {풀잎 단장}의 표제시로서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풀잎을 새롭게 조명하여 생명의 신비감을 노래한 작품이다. 풀잎이란 단순히 하찮은 존재가 아니라, 생명의 신비를 간직한 우주적 존재이다. 그런 측면에서는 인간도 마찬가지이다. 아주 작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풀잎과도 같이 조그만 고통에도 동요하고 번뇌하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 아닌가. 이렇게 시인은 풀잎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자신과 자연의 모습을 되돌아보게 하고 있다. 결국 이 시는 화자가 자신의 반성적 타자(他者)로 설정한 풀잎을 통해 주어진 운명대로 한 자리에 붙박여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면서도 '고달픈 얼굴을 마주 대고 나직이 웃'는 여유로움 속에서 시간의 흐름에 지친 영혼을 내맡기는 삶의 태도를 보여 주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조지훈이 그의 고향 경북 영양 일월산 황씨 부인 사당에 전해지는 전설을 소재로 하여 풀리지 않는 원한(怨恨)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으로 서정주의 <신부>와 매우 흡사하다. 그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일월산 아랫마을에 살던 황씨 처녀는 그녀를 좋아하던 두 총각 중 한 사람에게 시집을 갔다. 신혼 첫날밤 잠들기 전 화장실을 다녀오던 신랑은 신방문에 비친 칼 그림자를 보고 놀라 그 길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리 달아나 버렸다. 그 칼 그림자는 다름아닌 마당의 대나무 그림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리석은 신랑은 그것을 연적(戀敵)이 복수하기 위해 자신을 죽이려고 숨어든 것이라고 오해한 것이었다. 신부는 그런 사실도 모르고 족두리도 벗지 못한 채 신랑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깊은 원한을 안고 죽었는데 그녀의 시신은 첫날밤 그대로 있었다. 오랜 후에 이 사실을 안 신랑은 잘못을 뉘우치고 신부의 시신을 일월산 부인당에 모신 후 사당을 지어 그녀의 혼령을 위로하였다.

이 시는 5연으로 이루어진 산문시로서 의미상 크게 두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앞 단락은 1∼3연으로 풍상에 시달려온 돌문의 모습을 통해 천년의 한을 간직한 신부의 서러움을 노래하고 있으며, 뒷 단락은 4∼5연으로 미래에 있을지 모를 '당신'과의 해후(邂逅)를 그리고 있다.

1연에서는 이 시의 핵심적 이미지인 '돌문'이 제시되고 있다. 검푸른 이끼가 내려앉도록 천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오로지 '당신'의 따스한 손끝만을 기다리고 있는 돌문에게서 신부인 화자의 지극한 사랑과 간절한 기다림을 엿볼 수 있다. 2연에서는 '꺼지지 않을 촛불'을 통해 '천년이 지나도 눈 감지 않을' 신부의 슬픈 영혼을 보여 주고 있다. 3연에서는 '눈물과 한숨'으로 천 년의 세월을 견뎌온 돌문의 애틋한 모습을 '어찌합니까?'라는 체념 섞인 어조로 나타내고 있다. 4연에서는 지금까지의 격앙된 분위기를 일신하고 강한 어조로 절개의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당신'의 손길이 자신의 몸을 어루만지는 순간에야 한 줌 티끌로 사라질 것이라는 서러운 비원을 말하는 한편, 그렇게 사라질 자신의 존재를 눈물 없이는 결코 볼 수 없을 것이라며 '당신'에 대한 원망을 감추지 않고 있다. 5연에서는 또다시 천 년을 비바람에 낡아가며 그 자리에 서 있을 돌문을 통해 원한이 사무친 신부의 기다림을 노래하고 있다. 그러므로 1연에서의 돌문이 '기다림의 문'이라면, 5연에서의 돌문은 '원한의 문'으로 신부의 간절한 사랑과 그리움을 열리지 않는 돌문으로 비유한 것이다.


해방 직후 문단의 분위기가 좌파인 '조선문학가동맹'에 의해 좌우되자, 조지훈은 박목월, 김동리, 서정주, 조연현 등과 함께 순수 문학을 표방하면서 1946년 4월 '조선청년문학가협회'를 결성하였다. 그는 문학이 정치에 복무하는 것을 배격하면서 순수한 시 정신을 옹호하였다. 그에게 있어 시 정신이란 "시류(時流)의 격동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영원히 새로운 것"이었다. 이 시는 6·25 직전의 어수선한 시대 상황하에서 씌어진 작품으로 바로 그러한 순수한 시 정신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기·승·전·결의 전통 구조에 따라 의인화된 민들레꽃을 통해 임에 대한 애틋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어느 봄날, 노랗게 피어난 민들레꽃을 발견한 화자는 그것을 임의 현신(現身)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애틋한 사랑의 심경을 여성적 어조로 나직이 노래 부른다.

임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소리쳐 부를 수도 없는 이 아득한 거리'로 인해 '까닭 없이 마음 외로울 때' 발견한 민들레꽃이기에 그것을 임의 모습이라고 확신하는 화자는, 민들레꽃이 '맑은 눈을 들어 나를 보'는 순간, 자신의 절실한 그리움에 '얼마나 한 위로'가 되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여기서 '아득한 거리'라는 구절을 고려한다면, 시적 대상인 '임'은 화자가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자는 '사랑한다는 말 이 한 마디는 / 내 이 세상 온전히 떠난 뒤에 남을 것'이라며 임에 대한 영원한 사랑을 다짐한다. 이렇게 화자는 외롭고 그리운 마음을 민들레꽃에 투영하여 사랑의 다짐을 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김소월의 <초혼>은 화자가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는 회한을 강조함으로써 죽은 임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면, 이 시는 설령 죽은 임은 아니더라도, 화자가 죽고나서도 사랑한다는 말이 남을 것이라는 구절을 통해 자신의 영원한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이 시는 6·25 당시 국군에 의해 탈환된 평양에 입성해서 폐허화된 도시의 모습을 보고 전쟁의 참혹상과 민족의 비극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그러나 이 시는 전쟁의 의미 추구나 이데올로기의 우열(優劣)을 주장하는 격한 감정의 전쟁시가 아니기에 시인은 의도적으로 행 구분을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한 연을 긴 행 하나로 처리함으로써 전쟁을 바라보는 화자의 허망한 마음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 작품은 내용상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3연의 첫째 단락은 미군의 공중 폭격으로 인해 온통 폐허화되어 을씨년스러워진 평양 거리의 풍경을 '사람이 없다' 는 구절로 요약, 극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 때 어디엔가 숨어 있다가 잡혀 오는 한 여자 빨치산의 모습을 보여 줌으로써 아직도 전쟁이 계속되고 있음을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다. 이렇듯 황량한 폐허 속에서 화자는, 북한이 소위 '스탈린 거리'로 명명한 거리에 웅크리고 앉아 시나브로 떨어지는 나뭇잎을 바라보며 외로운 나그네와 같은 수심에 빠져들고 있다.

4∼5연의 둘째 단락에서는 화자가 십년 전의 과거로 돌아가 원산에서 평양까지 걸어서 왔던 기억과, 돈이 없어 그 유명한 평양 냉면 한 그릇 사먹지 못하고, 쓸쓸히 웃으며 평양을 떠났던 일을 떠올리고 있다. 볼 것 많고 먹을 것 많은 이 곳 평양에 '돈 없이는 다시 안 오리라'는 다짐을 하며 떠났던 그 옛 추억에서 현실로 돌아온 화자는 6∼7연의 셋째 단락에서 전쟁으로 인해 잿더미가 된 이 곳을 왜 찾아왔던가 하고 뉘우친다. 차라리 이 곳을 찾아 오지 않았더라면, 비록 십년 전의 그 즐겁지 않은 추억이나마 가슴에 간직하고 있는 편이 훨씬 더 아름답고 정겨웠을 것일텐데 하는 후회스러운 마음으로 대동문 다락에 오른 화자는 마침내 그 곳에서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조금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발견하고 패강(浿江), 즉 대동강의 무정(無情)함을 탄식한다. '아, 가는 자 이 같고나'라는 말은 공자(孔子)가 사물의 그침 없는 변화를 일러 한 말*로서 이 작품에서는 전쟁의 비극과 덧없음을 자연의 의구함에 대비시켜 강조한 표현이라 할 수 있다.

 

* 子在川上曰, 逝者如斯夫 不舍晝夜

공자께서 강변에서 이렇게 탄식하였다. '가는 자는 이와 같을까? 주야로 흘러 쉬임이 없구나!'

({論語}, [子罕篇])


이 시는 꿈의 문을 열고 들어간 시인이 그 곳에서 만나게 된 '마을'과 '바다'라는 두 개의 시적 공간을 통해 죽음에 대한 초월 의지를 담담한 어조의 이야기체 형식을 빌어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마을은 맷방석만한 꽃숭어리의 해바라기가 피어 있는 꽃밭으로, 그 곳에선 수천 마리의 낮닭이 갑자기 깃을 치며 울고 있다. 이에 반해 바다는 작은 배가 한 척 떠 있는 공간이며, 그 배에는 오색 비단 돛폭과 큰 북이 달려 있는 한편, 뱃전에 기대어 피리를 부는 수염 흰 노인도 있다.

마을은 커다란 꽃송이의 해바라기와 깃을 치며 우는 낮닭의 밝은 이미지로 나타나는 삶의 현실적 세계를 표상하지만, 바다는 꽃상여를 싣고 떠났다는 진술을 통해 그 곳이 죽음의 초월적 세계를 표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상반된 두 세계라 할지라도 그것들이 완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에서 파아란 바다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길목으로 제시된 '산 모롱잇길'에 의해 상호 연계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두 세계는 서로 교통(交通)하는 것으로, 삶은 죽음으로, 죽음은 삶으로 통하는 것이다. 시상의 개폐 기능을 하는 1연과 8연을 '문을 열고 / 들어가서 보면 /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와 '문을 닫고 나와서 보면 / 그것은 문이 아니었다'라는 구절로 배치시킨 시인의 의도는 바로 여기에 있음을 알게 해 준다.

이러한 측면에서 본다면, 이 작품에서의 '문'은 시인을 아름다운 꿈의 세계로 이끌어 주는 환상의 문이 아니라, 죽음의 세계를 투시할 수 있는 실존의 문이다. 이렇게 시인은 소멸과 허무의 일반적인 죽음 의식을 버리고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 또는 삶과 환치할 수 있는 죽음을 보여 줌으로써 생과 사를 초월하고 싶어하는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지조론(志操論)]이라는 글을 통해 지사적인 삶을 추구하던 조지훈이 말년에 이르러 병고에 시달리면서도 죽음조차 두려워하지 않는 의지적 인생관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의인화된 '병'을 대화의 상대자로 하여 이야기하듯 담담하게 진술해 가는 화자의 목소리에서 조지훈이 갖고 있던, 생에 대한 긍정적 인식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의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자칫 감상에 빠질 수도 있는 주제 의식을 이렇듯 차분하고 친근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죽음을 초월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를 스스로 강화시키는 한편, 독자들에 대해서는 인생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전 7연으로 구성된 이 시는 내용상 크게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2연으로 '병'이 생기는 때와 '병'의 성격을 말하고 있다. 화자에 의하면 병이란 언제나 일상적 삶에 열중하다 간신히 일손을 끝내고 '마악 안도의 숨을 돌릴려고 할 때'면 찾아오는 '우울한 방문객'이다. 그러나 화자는 그것을 두려움의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동안을 뉘우치게 하는' '나의 오랜 친구'라고 인식하고 있다. 둘째 단락은 3∼4연으로 '병'이 주는 교훈을 제시하고 있다. 그 가르침이란 다름아닌 열심히 일하는 중에서도 적당히 '휴식'을 취하라는 것과 '삶의 외경심'을 갖고 생활하라는 것, 그리고 '성실'하게 살아갈 것 등이다.

셋째 단락은 5∼6연으로 화자가 병을 앓음으로써 갖게 된 인생에 대한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화자는 삶에 대해 집착하지도 미련을 갖지도 않지만, 생을 아름다운 것으로 인식하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긍정적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 넷째 단락은 7연으로 '병'을 대하는 화자의 태도를 드러내고 있다. 행여 죽음까지도 가져다 줄 수 있는 무서운 병을 자신의 절친한 벗으로 생각하는 화자에게서 시인이 지니고 있는, 생사를 초월한 삶의 깊은 철학적 자세를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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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목월(朴木月)

본명 : 박영종(朴泳鍾)

1916년 경상북도 경주 출생

1933년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중 동시 <통딱딱 통딱딱>이 {어린이}에, <제비맞이>가 {신가정}에 각각 당선

1939년 {문장}에 <길처럼>, <그것은 연륜이다>, <산그늘> 등이 정지용에 의해 추천되어 등단

1946년 김동리, 서정주 등과 함께 조선청년문학가협회 결성,

조선문필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49년 한국문학가협회 사무국장 역임

1957년 한국시인협회 창립

1973년 시 전문지 {심상} 발행

1974년 한국시인협회 회장

1978년 사망

시집 : {청록집}(1946), {1946}(1946), {산도화}(1955), {란(蘭)·기타(其他)}(1959), {청담(晴曇)}(1964), {경상도의 가랑잎}(1968), {구름에 달 가듯이}(1975), {무순(無順)}(1976)


박목월의 초기시 세계는 {청록집}의 세계와 {산도화}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산도화}의 세계에 이르러 그 전대에 막연하게 드러난 임에 대한 슬픔의 정서가, '꿈꾸는 사람'으로서의 화자가 대상으로서의 '임'과 화해를 획득하는 구체적인 이미지로 제시된다.

이 시는 실재하는 자연이 아닌, 우리 한국인의 가슴 밑바닥에 내재해 있는 정신적 고향을 그린 작품으로, 동양적 이상향인 무릉 도원(武陵桃源)을 꿈꾸는 시인의 의식 세계를 엿볼 수 있다. 이상화(理想化)된 세계의 아름다운 자연과 풍경을 한 폭의 동양화로 그린 이 작품에서는 세상 이야기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1∼3연은 모두 배경이 되며, 4연에서 비로소 '암사슴'이 등장한다. 물론 시적 자아는 그것을 엿보는 사람이다.

'구강산'이라 명명(命名)된 선경(仙景)은 시인의 가슴 속에 존재하는 이상향 속의 산으로 <청노루>에서 보여 준 '자하산(紫霞山)', '청운사(靑雲寺)'와 동일한 이미지다. 그 구강산, 보라빛 돌산에 백색, 담홍색 산도화가 두어 송이 피어나고 있는데, 이것은 충만이 아닌 여백을 중시하는 동양적 미학의 반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상향의 공간에는 세속의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상서롭고 고결한 사슴 한 마리가 봄눈 녹은 옥 같은 물에 발을 씻고 있어 마치 신선도(神仙圖)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여기서 암사슴도 실재하는 동물의 의미라기보다는 '인간의 삶으로부터 멀리 떠난 자연 존재'의 상징이라는 시적 기능을 지닌다.

사람 이야기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 이 같은 가상 세계(假想世界)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이상향임에 틀림없지만, 이 작품을 현실 도피성 문학으로 비판받게 하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시인이 그리고 있는 '도화원(桃花源)'은 곧 우리 한국인들의 시원(始原)의 고향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단순한 현실 도피가 아닌 자연 합일의 동양적 정신을 구현함으로써, 잃어버린 고향과 자연을 회복시키려 했다는 긍정적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목월의 자연 친화 사상과 불교적 선(禪) 의식을 바탕으로 한 이 시는 달빛 내려 비치는 불국사의 고요한 정경을 지극히 절제된 언어와 교묘한 시행 배열로 그려낸 작품으로, <청노루>와 함께 "시는 서술이 아닌 묘사요, 이미지의 제시"라는 말을 실감하게 한다. 이 시의 특징은 서술적 표현을 배제한 명사로만 이루어진 통사 구조의 시행(6연의 '흐는히 / 젖는데'만 예외)으로 소위 '보여주기' 식의 시로 만든 것과 함께 조사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매 시행을 명사로 끝맺고 있는 점이다.

흰 달빛 내리는 어느 깊은 가을 밤, 엷은 안개가 드리워진 불국사의 자하문, 범영루의 신비스런 풍경을 대웅전의 석가모니불이 은은한 미소를 띠며 내려다 보고 있을 때, 토함산 계곡에서 흘러내리는 물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소나무 숲을 가로질러 불어오는 바람 소리[송뢰(松幡)]가 무거운 적막을 깨뜨린다. 불국사의 고풍스런 배경과 가을밤의 그윽한 분위기가 이상적으로 배합됨으로써 사진으로는 결코 포착해 낼 수 없는 은은하고 경건한 느낌까지도 이 작품은 짧은 시 형식으로 물씬 전해 주고 있다. 시각적 이미지와 청각적 이미지의 교감(交感), 극도의 압축과 생략이 빚어내는 동양화적 여백(餘白)의 미, 그리고 명상적 서정이 듬뿍 밴 이 작품의 이러한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 속에는 '뜬 그림자'와 같은 시인의 무상감(無常感)이 불국사의 밤안개처럼 짙게 배어 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향토적 정서가 교묘히 배합되어 있는 목월의 초기시 특징을 잘 드러내고 있는 이 시는 불국사 터 언저리의 배꽃에 비친 달빛을 간결한 시어와 정제된 시행을 통해 한 폭의 동양화로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부처의 나라'라는 뜻의 불국사가 주는 탈속적 느낌으로 인해 현실 속에 존재하는 자연이라기보다는 화자의 그리움이 만들어 낸 상상의 공간이요, 미의 극치가 구현된 공간으로 고결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하여 그가 그려낸 동양화는 단순히 감상의 대상이기보다는 내적인 기원을 바탕으로 하는 성스러운 지향의 대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한편, 이 시의 분위기는 고려 말엽의 이조년(李兆年)의 시조 <다정가(多情歌)> "이화(梨花)에 월백(月白)하고 은한(銀漢)이 삼경(三更)인제 / 일지춘심(一枝春心)을 자규(子規)야 알랴마는 / 다정(多情)도 병(病)인 양하여 잠 못 들어 하노라"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 여기서는 전통적 소재인 '배꽃'·'자규'·'달'이 그리움의 정서를 직접적으로 표출하는 데 비해, 이 시에서는 정서가 극도로 절제되고 내재됨으로써 단아한 풍경만이 수묵화처럼 제시되고 있다. 이러한 감정의 절제는 결국 시적 대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관조적 태도와 간결한 형식미로 나타나 있으나, 그 이면에는 민족의 보편적 정서인 정한(情恨)의 세계가 짙게 배어 있음을 느낄 수 있다.


이 시는 초기 청록파 시대의 시 세계를 벗어나 일상적 삶의 문제를 다룬 목월의 제2기 작품이다. 6·25의 격동기를 거친 그는 초기의 서정성 짙은 민요적 가락에서 벗어나 신변적인 제재를 선택, 시화(詩化)하여 시와 생활을 일원화시켰고, 그간의 정형률을 거의 찾아볼 수 없는 사설조의 형태로 인간의 내면 세계를 깊이 탐구하게 되었는데, 특히 그가 머물던 '원효로'를 중심으로 한 세속사의 탐구가 그의 제2기 시 세계의 주류를 이루었다. 제3기에 가면 종교적 신앙심을 주로 노래하며 신성사(神聖事)에 대한 지향과 갈망을 담담하게 그리게 된다.

이 시는 사랑하는 아우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작품으로 토속적 분위기와 정서적 안정감은 사라진 대신, 구체적인 일상 생활 속의 일을 다루는 시적 원숙함이 엿보인다. 전 26행의 단연시인 이 작품은 내용상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행부터 7행까지의 첫 단락은 아우를 장례 지내는 모습이다. 마치 자신의 '깊은 가슴에 밧줄로 달아 내리듯' 아우의 육신을 담은 관이 땅 속으로 무겁게 내려질 때, 그는 '옷자락에 흙을 받아 / 좌르르' 쏟아 부으며 산 자와 죽은 자 사이의 이별을 확인하게 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난 아우에 대한 처절한 슬픔을 표현하면서도 직접적인 표현을 배제함으로써 오히려 억제되어 더 깊어진 슬픔을 느끼게 한다.

8행부터 14행까지의 둘째 단락은 장례를 마친 후의 어느 날 꿈에서 아우를 만난 이야기이다. 아우는 '형님!'이라 불렀고, 그는 '전신으로 대답했'지만, 산 자와 죽은 자의 먼 거리감으로 아우는 듣지 못했을 것이라는 독백에서 그의 안타까운 절망감을 엿볼 수 있다.

15행부터 끝행까지의 셋째 단락은 아우에 대한 그리움과 단절감을 바탕으로 한 이승과 저승의 아득한 차이를 보여 주고 있다. '네 음성을 나만 듣는' 이 곳은 '눈과 비가 오는 세상'이고, 아우가 간 곳은 '내 목소리는 미치지 못하는' 곳으로 이승과 저승, 현실의 세계와 영원의 세계를 대립시켜 더욱 간절한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자신이 있는 이 곳을 '열매가 떨어지면 / 툭 하는 소리가 들리는 세상'이라 하여 작품을 끝맺고 있는데, 이것은 아우의 죽음에서 오는 인생의 허무감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신생 ― 성장 ― 사멸'하는 생물체의 생의 순환이 존재하는 것이 이승의 삶임을 상징한다. 열매가 맺는 것을 삶 그 자체라고 한다면, 열매가 떨어지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므로 이 곳은 일회적이고 찰나적 세계일 수밖에 없음을 화자는 절감하며 더욱 깊은 무상감에 젖어 드는 것이라 하겠다.


이 시는 일상 생활의 체험 영역을 시적으로 형상화함으로써 목월의 초기시에서 보여 준 감각적 단순성을 벗어나는 중기시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알 수 있듯 일상의 체험을 서정의 세계로 끌어들이고 있지만, 그는 현실에서의 갈등이나 대립을 초극하기 위한 의지를 노래하지 않는 대신, 자기 정서의 자연스러운 반응만을 드러냄으로써 목월 특유의 서정성이 조금도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삶의 애환을 포괄하면서도 그 현실에 대응하는 적극적인 자세를 내세우는 법이 없이, 목월은 그 천품(天稟)의 가락을 노래하는 시인으로 일상의 가운데에 서 있는 것이다.

식욕을 바탕으로 한 실존적 자아의 모습을 극명히 보여 주는 이 시는 제목 '적막한 식욕'의 '적막'과 '식욕'으로 상징되는 삶의 속성을 제시하고 있다. 식욕이란 삶의 기본적인 속성이며, 삶을 영위해 나가는 가장 기초적인 욕구이다. 이러한 삶의 기본적 욕구가 앞의 '적막한'이라는 수식을 통해서 쓸쓸하고 조용한, 그리고 막막한이라는 정서적 속성과 결합되는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된다. 이러한 존재의 속성을 표출한 상징적 음식이 바로 '모밀묵'이다.

연 구분이 없는 전 12행의 단연시이지만 의미에 따라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단락은 1행으로 '모밀묵이 먹고 싶다'는 화자의 '적막한 식욕'을 진술하는 부분이며, 둘째 단락은 '모밀묵'의 속성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싱겁고 구수하고 /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모밀묵은 마치 '촌 잔칫날 팔모상에 올라 / 새 사돈을 대접하는' 데 적격(適格)일 것 같은 수수하고 소탈한 속성의 음식임을 보여 주고 있다. 셋째 단락은 그러한 '모밀묵'에 대하여 화자가 의미를 부여하는 부분이다. 그것은 '저문 봄날 해질 무렵에 / 허전한 마음이 / 마음을 달래'며 먹는 음식으로 '쓸쓸한 식욕이 꿈꾸는 음식'일 뿐만 아니라, 고독하게 살아가며 '인생의 참뜻'을 깨달은 자가 '너그럽고 넉넉한 / 눈물'로 제 삶을 반추하며 먹는 음식이다.

이 시는 '모밀묵'이 갖는 속성이 '봄날 해질 무렵'이라는 시간의 이중적 속성('봄날'은 생명성이 발현되는 시간으로 상승적 이미지인 데 비해, '해질 무렵'은 낮에서 밤으로 가는 시간으로 하강적 이미지임)과 결합하여 '마음 = 꿈'이라는 추상적 공간으로 화자의 고독한 존재 양상을 보여 준다. 한편, 이 시는 모밀묵을 먹는 사람들의 식성과 모밀묵을 먹는 사람들의 삶의 속성을 함께 나타내고 있다. 그들은 '싱겁고 구수하고 / 못나고도 소박하게 점잖은' 모밀묵과 같은 모습으로 결국 자연과 동화될 뿐 아니라, 수직적·수평적 인간 관계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우리라는 테두리 속에서 살아가는 평상인이 되며, '인생의 참뜻을 짐작한 자'들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이러한 사람들의 실존적 모습을 '모밀묵'을 통해 상징적으로 보여 준 작품이다.


이 시는 화자가 자유로운 여행길에서 바라본 나무에서 여행지마다 달리 나타나는 독특한 이미지를 통해 인생에 대해 갖는 다양한 상념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연 구분이 없는 산문시로 되어 있는 이 시는 화자의 공간 이동에 따라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화자는 '유성' → '조치원' → '공주' → '온양' → '서울'이라는 공간적 이동을 하고 있는데, 그 공간의 이동은 '나무'라는 존재가 위치하는 장소에 따라 화자의 존재 의미가 다르게 나타난다. 즉, 화자는 공간을 바꿔가며 여러 대상을 보여 주는 것이 아니라, '나무'라는 하나의 존재만을 지향하고 있다. 이는 결국 이동을 통한 '존재'에의 접근 양식이 되며, 이 접근 양식에 따라 '나무'라는 존재의 전이 양식이 결정됨을 보여 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는 공간의 이동에 따른 장소와 관련되는 존재 의미가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단 락

공 간

장 소

이미지

인 상

1단락

유성 → 조치원

들판

수도승

묵중함

2단락

조치원 → 공주

마을 어귀

과 객

추워 보임

3단락

공주 → 온양

산마루

파수병

외로워 보임

4단락

온양 → 서울

내 안

그들

묵중·침울·고독


1단락의 '유성→조치원'의 이동에서 화자가 발견한 '나무'는 '들판'에 있는 '늙은 나무'로 '우두커니'라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것은 시간의 흐름을 지향없이 수용하는 자연에 대한 사실적 인식을 보여 주는 것으로 아무런 걸림이 없는 '들판'과 대응한다. 이 같은 들판에 '우두커니 서 있는 늙은 나무'의 모습은 시간의 흐름을 자연스럽게 수용하는 자연적 존재의 모습으로, 그것은 화자의 의식에 따라 '수도승'이 된다. 그러므로 자연적 존재인 '늙은 나무'에서 인격적 존재인 '수도승'으로의 의미 전이를 통해 '우두커니'도 '묵중한'으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2단락에서는 '조치원→공주'로 공간이 이동되고 시간은 '다음날'이 된다. 이 때 나무는 '그들'이란 생명적 존재로 바뀌어 있으며, 장소는 '가난한 마을 어귀'가 된다. 마을이란 사람이 모여 사는 장소로 '그들'과 '마을'은 상응되며, '멍청하게'의 상태인 '그들'이 시간의 흐름을 상실하게 됨으로써 그들도 '과객들'이라는 시간을 상실한 인격적 존재가 된다. 그러므로 '멍청하게 몰려 있는 그들은' 화자의 의식과 결부됨에 따라 '추워 보이'는 실존적 존재의 표상이 되는 것이다.

3단락은 '공주→온양'의 이동 공간 중 '우회로 뒷길 산마루'에서 만나는 '나무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산마루'는 공간을 초월하려는 지향성을 보여 주는 것이며, 이러한 지향성은 '하늘문'이라는 공간성으로 나타난다. 하늘 / 지평의 대응에서 그 지향성은 '하늘문'에서 '문'에 차단됨으로써 그들은 고독한 실존적 존재가 된다. 나무들이 '파수병'으로서 전이될 수 있는 것은 바로 화자의 이 같은 의식 때문이며, '외로움'은 그들에 대한 화자의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4단락은 이동 공간이 '온양→서울'이지만, 이것은 결국 화자의 삶의 공간으로의 회귀이다. 그러므로 나무라는 자연적 존재는 앞의 1·2·3단락들의 요소를 통합하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즉, 나무라는 존재는 '묵중'·'침울'·'고독'이라는 존재성을 드러내며 화자와 동일화된 존재가 되는 것이다.

이렇게 이 시는 시인이 여행하면서 목격하게 된 나무들의 세 가지 모습을 '묵중'과 '침울', 그리고 '고독'의 세 가지 양상으로 변전(變轉)시키는 과정을 통해 인생의 궁극적 의미를 찾아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시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는 아내를 불안한 마음으로 찾아가, 가슴 졸이며 회복을 기다리는 남편의 애타는 심경을 함축된 시어와 심도(深度) 있는 이미지로써 표현한 작품이다. <자하산(紫霞山)>류의 전통적 시관(詩觀)에서 벗어나 언어와 의미가 형평(衡平)을 이룬 이 작품은 일종의 초현실주의적 수법을 사용하고 있다.

아내가 입원하여 수술을 받게 되었을 때, 병원으로 향하는 남편의 발걸음은 무겁기 짝이 없을 것이고, 병원까지 가는 도중, 수술 결과에 대한 불안과 초조감으로 벼라별 생각이 다 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제목인 <우회로>는 단순히 '멀리 돌아서 가는 병원 길'이 아니라 '병원을 찾아가는 남편의 불안한 마음의 길'인 것이다.

불안에 사로잡힌 시적 자아의 경험과 연상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질서 없이 동시적(同時的)으로 작품 속에 뒤엉켜 있는 내적 고백 형식의 이 작품은 전 19행으로 된 단연시로 내용상 2단락으로 나누어진다.

1∼10행의 1단락은 달빛 내려 깔린 듯한 불안감으로 병원을 찾아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과, 아내의 수술이 무사히 끝나 안도하는 모습을 마치 남의 이야기하듯 객관적으로 번갈아 교차시켜 보여 주고 있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수술이 끝난 후, 화자인 남편은 병실 밖에서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다. 이윽고 '달빛 깔린' 불안감의 오랜 시간이 지나 '피가 응결되고' 서서히 마취가 풀리며 아내는 깨어나게 된다.

11∼19행의 2단락은 1단락의 내용이나 구성이 유사하다. 생사(生死)의 갈림길에서 '흔들리던' 아내가 마침내 혼수 상태에서 깨어나 화자에게 미소를 짓는다. 아내가 마취에서 풀리듯 긴장했던 화자의 마음이 풀릴 때, 밖에서도 점차 어둠이 풀리며 새벽이 가까이 오고 있다. 그러므로 '하얀 나선 통로'는 '우회로'와 동일한 이미지로 그것의 한층 고조된 표현이다.

죽음은 사랑과 함께 오랜 옛날부터 가장 널리 노래되는 문학 소재이다. 그것은 아마 우리의 삶에서 그것들이 차지하는 비중이 가장 크고, 그로 말미암아 우리의 삶이 더욱 깊어지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들은 알 수 없는 인연의 질긴 줄에 이끌려,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타의적으로 주어진 삶을 살아가며, 사랑으로 인해 생(生)의 희열을 느끼기도 하고, 이루지 못하는 사랑에 괴로워 울기도 한다. 또한 언젠가는 반드시 찾아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으로 많은 고통을 받기도 한다.

이 작품은 바로 죽음을 소재로 하여 죽음을 넘어서는 인연과 그리움을 노래하고 있다. 앞의 <하관>이 아우의 죽음을 다룬 것에 비해, 이 작품은 누구의 죽음을 말하고 있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끊을 수 없는 인연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 것을 보면, 시인의 가족이거나 절친했던 친우(親友)일 것으로 짐작될 뿐이다.

이 시의 형식적 특징은 먼저 화자와 청자를 등장시켜 대화체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뭐락카노'라는 사투리가 제시하는 삶의 본질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과, '오냐'라는 시어가 제시하는 응답 내지 수긍의 상황이 작품 전체의 시상과 적절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강'으로 나누어진 삶과 죽음의 세계에서 시적 화자인 '나'는 이승인 강 이편에서 저승인 강 저편으로 건너간 사람을 간절히 그리워하고 있다. 나는 지금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에 앉아 '저편 강기슭에서' 나를 향해 외치는 그의 말을 들으려 하나, '바람에 불려서' 도저히 알아 듣지 못한다. 그래서 '니 뭐락카노' 하며 나도 그를 향해 소리 지르지만,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그에게 전달되지 못하고 그저 강안(江岸)에 흩어질 뿐이다. 왜냐하면, '강'이 너무 넓기 때문이다. 즉, 나와 그는 강으로 나누어진 삶과 죽음의 세계에 각각 따로 존재할 뿐 아니라, 이승과 저승 간의 거리는 아무리 큰 소리로 외쳐도 전혀 들리지도, 들을 수도 없는 아득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뱃머리'는 이승과 저승의 갈림길이다. 이것은 화자가 죽음을 앞둔 사람이라기보다는 삶과 죽음에 대한 시인의 깊은 인식 태도를 뜻하는 것으로, "죽음은 언제나 내 안에 있다.", "대문 밖이 저승이다."라는 우리 속담과 상통하는 사생관(死生觀)의 반영인 셈이다.

그의 말을 알아 듣지 못해 애태우는 화자가 '뭐락카노'를 되뇌이며 그의 말을 들으려 할 때, 그와의 이승에서의 인연을 상징하는 '동앗밧줄'은 점차 '썩어서' '삭아내'린다. 그가 이승에 남겼던 삶의 족적(足跡)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 맺었던 '나'에게까지 그는 잊혀져 가는 것이다. 그것이 못내 아쉬운 나는 그와의 깊은 인연을 생각하며 '하직을 말자'고 자기 자신에게 약속한다. 이것은 이승에서의 인연을 저승에까지 계속 연장하고 싶어하는 안타까운 모습이다. 그리하여 화자는 그와의 '인연은 갈밭을 건느는 바람'이라 선언하며, 삶과 죽음 사이의 강이 아무리 드넓다 하더라도, 우리가 맺은 '인연의 바람'은 그것을 뛰어 넘어 끊임없이 불어 가고, 불어 오고 할 것임을 확신하게 된다. 그러니까 '바람에 불려서'와 '바람에 날려서'처럼 '장애(障碍)'의 이미지로 사용되던 바람이 여기서는 인연의 '정도(깊이)'를 표상하는 것으로 변하고 있다.

이제 끊어질 듯했던 그와의 인연이 더욱 깊어진 탓으로, 마침내 그의 '흰 옷자락'이 보이게 되고, 분명하지는 않아도 그의 말이 희미하게 들리게 된다. 그래서 나는 '오냐, 오냐, 오냐. /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다시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 것이다. 이 다짐의 말도 '바람에 날려' 그에게 잘 들리지는 않아도, 화자는 더욱 큰 소리로 재회의 약속을 하며 그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을 애타게 노래하는 것이다.


이 시는 힘겨운 일상의 삶을 살아가는 생활인으로 돌아온 시인이 아버지로서의 고통을 토로하는 한편, 자식들에 대한 막중한 책임 의식을 스스로 확인하는 작품으로, 현실적 세계를 시적 대상으로 삼은 생활시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시에서는 화자와 청자의 모습이 뚜렷하게 드러나 있다. 화자는 실제의 시인과 거의 일치하며, 청자는 '강아지'라고 불린 그의 자녀들이다. 얼음판 같은 세상의 모습을 말하면서 다소 비감스러워하던 화자의 목소리는 자녀들에게 말을 건넬 때, 따뜻하게 바뀌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1연은 화자의 귀가로부터 시작되고 있다. 피곤한 육신을 이끌고 집에 돌아온 화자는 현관에 가지런히 놓인, 문수가 각기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바라본다. 가난하면서도 행복한 화자의 가정이 아홉 켤레의 신발 속에 함축되어 있다. 직업이 다르고 신분이 달라도, 또는 부유하건 가난하건, 그래서 그것이 현관이건 들깐이건 사람 사는 모습은 결국 똑같다. 그러므로 '지상'이라는 시어는 힘겨운 일상의 삶이라 할지라도 일단 가정으로 돌아오게 되면, 가정은 그 가족만의 하나의 행복한 지상 세계라는 뜻이라 할 것이다.

2연에서 화자는 식구들의 신발 옆에 자신의 신을 벗어 놓는다. '눈과 얼음의 길'은 바로 화자가 살아가는 고달픈 인생길을 상징하는 것으로, 4연에서는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아홉 켤레의 신발 중에서 특히 막내둥이의 것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막내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강조하는 것이자,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스스로 확인하는 행위로 볼 수 있다.

3연의 1∼2행은 비록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온 화자이지만, 자녀 앞에서는 환하게 웃는 모습을 보이고 싶다는 의지의 표현이며, 3∼5행은 고달프게 살아가는 화자의 가정을 의미한다. '연민한 삶의 길이여'라는 6행은 화자가 삶에 대해 느끼는 힘겨움을 직설적으로 토로한 것이며, 7행에서뿐 아니라 작품 전편에 등장하는 '내 신발은 십구 문 반'이라는 구절은 막내의 '육 문 삼'과 대비되어 화자가 자신의 신발을 거듭 의식하면서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겠다는 다짐이다.

4연은 화자가 방에 들어가며 자식들에게 들려 주는 말이다.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 내가 왔다 / 아버지가 왔다'는 표현은 현실 생활에 시달리는 화자의 고달픈 삶을 극명히 보여 주는 것이며, 비록 고달프게 살아가는 가정이지만,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 존재한다'는 사실을 '십구 문 반'이라는 신발 크기로 강조하는 것은 그 큰 신발 속에 아홉 명의 자식들의 미래를 담고 있다는, 가장으로서의 무거운 책무를 강조하는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이 시는 고달픈 생활 속에서도 자식들의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하는 힘겨운 아버지들의 모습을 화자의 가정을 통해 잘 보여 주는 작품이다.


민요적 가락에 바탕을 둔 토속적 서정의 세계를 노래하던 박목월이 일상적 생활인으로서의 진지한 모습을 보여 준 중기시를 지나 도달한 곳은 역사적, 사회적 현실과 사물의 본질 추구 등 지적 인식(知的認識)의 관념적인 세계이었다. 이 시는 바로 그 같은 후기시 세계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세상의 모든 일을 깨달은 것 같은 달관의 자세가 잘 나타나 있다. 어찌 보면 호사스런 감정의 과잉이거나 초로(初老)의 인생에서 가질 수 있는 허무 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할 수도 있으나, 무의미하다고도 할 수 있을 듯한 '빈 컵'에서마저 따뜻한 애정과 아름다움을 발견해 내는 목월 특유의 관찰력이 그의 인생관과 결합하여 잔잔한 공감과 미감을 자아냄으로써 목월이 도달한 원숙한 경지를 가늠케 해 준다.

충만한 영혼에의 구도적 자세를 주제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빈 것은 / 빈 것으로 정결한 컵'이라는 첫 시행에서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빈 컵'이란 화자가 도달하고 싶어하는 경지를 함축하고 있는 구절이다. 컵은 채워져야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어 있음으로써 아름다울 수 있다는 깨달음은 일체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하고 싶어하는 시인이 얻은 달관의 자세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은 '고드름 막대기로 / 꽂혀 있는', '마른 가지로 / 타오르는 겨울 아침' 처럼 삭막하고 메마르고 거친 곳임을 인식한 화자는 그 같은 현실 속에서는 더 이상 '빈 것이 있을 수 없'음을 깨닫는다. 그 '빈 것은 / 빈 것으로 정결'할 수 있다지만, 현실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음을 아는 화자로서는 이제 그것을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고심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빈 것'을 채우는 일은 피조물인 인간의 의지나 능력으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생명을 주신 절대자만이 할 수 있는 일로, 마침내 '서늘한 체념'이나 '신앙의 샘물'이라는 결론을 얻는다. 절대자가 주신 '신앙의 샘물'로 자신의 내면 세계를 채운 화자는 그것으로 그치고 마는 것이 아니라, '창조의 손'으로 '가장 매혹적인 죠세피느 불르느스'라는 이름의 '장미'를 자신의 내면에 꽂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신앙의 샘물'을 먹으며 자라나 꽃피게 될 참다운 사랑의 꽃이야말로 그가 꿈꾸는 인간 존재의 가장 아름다운 경지이다. 이렇듯 이 시는 정결한 영혼의 '빈 것'으로 존재할 수 없는 인간 존재의 한계를 인식한 시인이 순수한 신앙의 힘에 의존하여 모진 세상을 극복하고, 나아가 인간 존재의 가치를 구현하겠다는 의지를 보여 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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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두진(朴斗鎭)

작가 약력- 1장 참조

이 시는 행 구분은 없고 연 구분만 있는 4연 구성의 산문시이다. 의성어와 의태어의 다양한 구사와 반복적 어구를 통해 형성된 유장하면서도 운치 있는 산문 율조 속에는 자연의 생명력을 표상하는 시어들과 비관적 현실 인식을 드러내는 부정적 어사의 시어들이 대조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박두진의 초기시들은 일반적으로 부정적이고 비관적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좌절하지 않고 시인 특유의 미래 지향적인 낙원 회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여 주는 특징을 갖는다. 이 작품 역시 그러한 특징을 시어 사용에서부터 잘 보여 주고 있다. 즉, '안 오고'·'안 불고'·'가버린'·'잊어버린'·'오지 않는' 등의 부정적 의미의 시어들이 빈번히 나타나 있는 한편, 시간적 배경도 '밤'·'어둠'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자연의 생명력이 강하게 분출됨으로써 부정적이고 비관적인 현실 상황을 상대적으로 상쇄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결국 '청산'에서 발견한 소멸과 생성으로서의 자연의 원리를 상실과 회복으로서의 역사, 인간사의 원리로 승화시킴으로써 비관적 현실 인식을 극복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화자는 소멸과 생성의 주기적 순환으로 인해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는 '청산'을 통해, 현실은 비록 '어둠', '밤'과 같이 비관적이지만, 그것은 일시적 현상일 뿐, 머지않아 '밝은 하늘 빛난 아침'이 찾아올 것이라는 미래 지향적 태도를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소멸과 생성으로서의 자연의 원리를 표층 구조로, 상실과 회복으로서의 역사의 원리를 심층 구조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연에서는 주로 '청산'의 생명력을 보여 주고 있다. '우뚝 솟은 푸른 산', '철철철 흐르듯 짙푸른 산', '숱한 나무가 무성히 우거진 산', '금빛 햇살이 내려오는 산'에서 드러나듯 '청산'은 풍요롭고 아름다운 생명력의 표상으로 제시된다. 이렇듯 자연은 소멸과 생성의 주기적 순환의 과정을 통해 영원한 생명력을 의미하게 된다. '철철철'은 산의 푸르름을 드러내는 표면적 의미 외에 나무의 무성함, 금빛 햇살의 순수함까지도 함축하는 복합적 의미이며, '둥둥'은 구름의 움직임을 보여 주는 한편, 산과 화자를 연결시켜 정중동(靜中動)의 술렁임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사슴도 안 오고 바람도 안 불고, 너멋골 골짜기서 울어오는 뻐꾸기'와 같은 구절을 통해 비관적 현실의 일단을 나타내기도 한다.

2연에서는 이러한 비관적 현실 인식이 더욱 심화되어 나타난다. 그것은 바로 '아득히 가버린 것 잊어버린 하늘과, 아른아른 오지 않는 보고 싶은 하늘에, 어쩌면 만나도질 볼이 고운 사람이, 난 혼자 그리워라. 가슴으로 그리워라.'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청산의 생명력보다는 채워지지 않는 그리움이 제시된다. 화자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잊어버린 하늘'과 '볼이 고운 사람'으로, 비관적인 현실 세계에서 찾을 수 없는 모든 것이 동경의 대상이 됨을 알 수 있다. '줄줄줄'은 눈물과 물소리에서 비롯된 의태어로 산의 가슴과 화자의 가슴을 동일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3연에서는 비관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미래 지향적 태도가 제시된다. '티끌 부는 세상에도, 벌레 같은 세상에도'에서 알 수 있듯 현실은 비관적이지만, 화자는 '달 가고, 밤 가고, 눈물도 가고, 틔어 올 밝은 하늘 빛난 아침'이 오듯, 그가 그리워하는 대상은 '향기로운 이슬밭 푸른 언덕을, 총총총 달려도 와 줄' 것이라 믿고 있다. 이렇게 화자는 청산에서 발견한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인간사, 역사에서의 상실과 회복의 원리로 승화시킴으로써 비관적 현실을 극복하고 있다.

4연에서는 '너'에 대한 동경의 마음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명되고 있다. '눈에 어려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 아우성쳐 흘러가는 물결 같은 사람 속'에서 '혼자서 철도 없이' '너'만 그리겠다는 동경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맑고 푸른 초가을 하늘을 우러러보면서 샘솟는 생의 기쁨과, 나아가 자연과의 합일(合一)을 이루는 경지를 연쇄의 표현 기법과 정제된 언어로써 잘 나타낸 작품이다. 박두진이 노래하는 자연은 다른 청록파 시인들이 추구하는 목가적 세계로서의 자연이 아니라, 종교적 신앙과 일체화된 신성(神性)의 자연이다. 전 7연의 이 작품은 내용상 2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1∼4연)에서는 가을 하늘을 바라보는 시적 자아가 그 아름다움에 도취됨으로써 무아지경(無我之境)에 빠져들어 자연의 넓은 품에 안기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하늘과 하나가 된 희열감(喜悅感)과 함께 자연의 숭고함에 대한 시인의 경건한 자세가 나타나 있다.

둘째 단락(5∼7연)에서는 시상이 점차 고조되어 '능금처럼 내 마음이 익는다'는 마지막 행에서 그 절정을 이루고 있다. '따가운 볕 / 초가을 햇볕으로' 세속에 물든 자신의 육신을 씻어낸 다음, 그 깨끗해진 가슴에 절대 순수의 '하늘'을 가득 채워넣었을 때, 마침내 영혼은 빨갛게 익어가는 '능금처럼' 성숙, 결실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하늘'은 단순히 자연의 일부가 아니라, 시적 자아의 세속화된 영혼을 맑게 씻어줌으로써 그의 삶을 살찌우는 생명수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박두진에게 있어 하늘은 생명의 근원이며 삶의 주재자로서, 일종의 종교적 구원의 주체요, 경외(敬畏)의 대상인 절대적 '하늘'로 우리 민족의 '경천(敬天) 사상'과 맥락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시작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자연을 시의 유일한 대상으로 삼은 박두진에게 있어서 자연은, 다른 자연파 시인들처럼 현실 도피의 수단이나 단순한 서경의 대상이 아니었을 뿐 아니라, 자신의 감정 이입의 대상도 아니었다. 그것은 오히려 현실 참여의 한 방편으로서 '삶을 위한 자연'이었다.

박두진의 시가 대부분 희망에 찬 열띤 목소리로 긍정적인 신념을 노래하고 있는 것에 반해, 이 시는 일제 말기의 암담한 현실 속에서 구원을 바라는 외로운 심경을 감미롭고 애조(哀調) 띤 서정성으로 표출함으로써 짙은 감동을 불러 일으킨다. 이 시는, 인간의 본원적 고독과 적막한 정서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시적 배경의 변모 과정과 대응하여 절제된 율감(律感)의 시어로 형상화된 작품으로, 내용에 따라 1∼3연, 4∼8연, 9∼10연의 3단락으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은 가을 산의 고적한 모습과 화자의 외로운 정황을 제시하는 부분이다. 산새도 구름도 없는 가을 산, 그것도 점차 어두워져 가는 어스름 때에 홀로 앉아 있는 모습을 통해 화자의 외로움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가을 산은 벗할 존재가 없는 화자의 외로움을 한층 심화시키는 기능을 갖는다.

둘째 단락은 화자의 내면 세계를 관조적으로 보여 주는 부분이다. 인적 끊인 가을 산에 외로이 앉아 있는 화자는 대답할 사람이 없는데도 소리 높여 불러 본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메아리로 돌아옴으로써 자신의 허전하고 적막한 내면의 고통을 더욱 심화 확대시킬 뿐이다. 황혼이 지나면 밤이 오고, 밤이 오면 별이 뜨는 자연의 원리처럼, 삶의 고독과 사랑의 고통은 인간이면 누구나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하는 절대적 원리이자 숙명으로 화자에게 인식되어 있다. 점점 어두워져 가는 시간적 흐름을 통하여 자신의 심경도 점차 우울해지는 정서의 변화가 나타나 있는 한편, 어둠이 깃든 산 속에서 현실적 외로움을 느끼는 화자는 점점 더 '그대'에 대한 끝없는 사랑의 고통을 겪고 있다.

셋째 단락은 '그대'를 향한 그리움을 나타낸 부분이다. 여기서 그리움의 대상인 '그대'가 구체적으로 누구를 지칭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하여튼 화자는 그 때문에 고통을 느끼고 있다. 화자의 이 같은 외로움이 '그대'에 대한 그리움을 심화시키지만, 결국 그 그리움은 자기 위안과 같은 애잔한 슬픔을 낳는다. 어둠과 괴로움을 인내하는 것은 떠나간 '그대'를 염려하는 사랑의 표현이지만, 현실적 고통은 지금도 여전히 남아 그를 괴롭힌다. '이제도'라는 시어는 '그대'를 향한 화자의 영원한 사랑을 함축하고 있으나, 바로 이 사랑 때문에 그는 끝내 슬픔을 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화자가 갖는 슬픔은 오히려 자신의 삶과 현실에 대한 진솔한 인식과 긴장의 원천이 됨으로써 '그대'를 향한 한층 심화된 사랑으로 승화될 수 있는 것이다.


이 시는 앞선 시대의 작품들이 보여 준 바 있는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정서적 감수성은 사라진 대신, 현실적 상황과 그 극복의 문제에 깊은 관심을 기울인 작품이다. 박두진의 {거미와 성좌}는 전쟁으로 황폐해진 민족의 비극적 상황을 강한 어조로 고발하고 어두운 민족 현실을 구원하기 위한 역사 의식과 민족 의식을 통찰력 있게 제시한 시집이다. <강 2>는 바로 이 시집의 주제 의식을 충실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으로, 역사를 상징하는 '강'을 통해 고통으로 얼룩진 고난의 시대를 청산하고, 행복으로 가득찬 새로운 미래를 갈망하는 인간 역사를 노래하고 있다. 이념으로 인해 빚어진 동족 간의 갈등과 반목, 결국은 살상으로까지 이어진 민족의 비극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족 정신이 무엇인지 구명(究明)하고 있다.

'강물은 아침 숲에서 흘러 나와 꽃에 젖어 흐르며 바다로 간다.'는 것이 이 작품의 대강의 줄거리이다. 여기에서 숲은 뱀과 독수리, 이리와 비둘기가 서로 죽이고, 할퀴고, 싸우며 살아가는 곳으로 폭력과 파괴, 분열과 증오로 얼룩진 공간의 상징이자,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의 상징이다. 그런데 그 강물이 아침 햇살을 받으며 숲에서 흘러 나오는 순간, 밤새도록 어둠으로 덮여 침묵하고 있던 강물은 비로소 고운 색채를 띠게 된다. 그와 함께, 만약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또는 아침이 늦게 온다면, 그 숲 속에서는 더욱 피비린내 나는 살육이 계속되었을 것이라는 불안감마저도 깊은 강물 속으로 수장된다. 그리하여 아침이 돌아와 강물이 꽃에 젖어 흐르게 되자, 밤새도록 울부짖으며 싸우던 짐승들의 울음 소리는 마침내 눈부신 아침 햇살을 받아 일제히 사라지는 한편, 피를 흘리며 죽어간 일체의 것들도 흐르는 강물에 씻겨 바다로 떠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바다는 강이 지향하는 목표이자 종착지로서 인간 역사가 반드시 도달해야 할 화해와 합일, 평화와 사랑의 새 시대이지만, 강물은 바다로 쉽게 흘러가지는 못한다. 그래서 마지막 행에서 '강 흐름 핏무?길 바다로 간다.'고 한 것이다. 그렇지만 시인의 비장한 어조 속에는 그러한 고난과 역경들을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고통의 옛 역사를 끝내고 웅비의 새 시대를 열겠다는 굳은 의지와 확신이 잘 나타나 있다.


이 시는 꽃이 피어나는 과정을 통해 자연의 고귀한 아름다움과 생명의 신비를 노래한 작품이다. 그러나 단순히 자연물의 생성 과정을 노래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생명의 철학적 깊이를 관조하는 데까지 나아가고 있다. 즉, 꽃이라는 자연물을 통해 삶과 죽음의 정신적 가치를 재발견함으로써 생명의 근원과 경이로움과 같은 생명체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시는 꽃을 '속삭임'·'울음'·'피 흘림'·'핏방울'·'정적'·'호심' 등 다양한 비유 관념으로 제시함으로써 주제를 심도 있게 형상화시키고 있다.

1연에서 화자는 '꽃'이라는 생명 탄생의 신비롭고 엄숙한 순간을 '해와 달의 속삭임 / 비밀한 울음'으로 제시하고 있다. 해와 달이 속삭이고 비밀스럽게 우는 자연의 합일에 의해 형성된 모든 생명의 실체는 보통의 인간이라면 감히 알 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화자도 그것을 분명히 인식하지 못하기에 이와 같이 '속삭임'과 '울음'의 비유법으로 보여 주고 있다.

2연에서 화자는 '한 번만의 어느 날의 / 아픈 피 흘림'이라고 함으로써 생명의 유한성 또는 일회성을 드러내고 있다. 그 생명은 분명 자연의 섭리로 탄생되는 거룩한 것이지만, 한 번 떨어지면 '다시는 못 들이킬' 일회적인 것이므로 3연에서는 그것을 '엇갈림의 핏방울'이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4·5연에서 화자는 꽃의 황홀함과 아름다움을 교차시켜 보여 주고 있다. 생명은 고귀한 것이고, 이런 생명에서 배태되는 사랑은 언제나 '꺼질 듯 보드랍고', '펼치면 일렁이는' 호수와 같은 '정적'과 순수이다. 이 사랑이야말로 우주 만물의 근원이자, 모든 생명의 궁극적인 귀결점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갈구하고 신비롭게 노래했던 생명의 실체는 결국 자연과 인간의 황홀하고 아름다운 사랑임을 알 수 있다.


6·25를 거치면서 자연을 바라보던 시선을 현실로 옮기게 됨에 따라, 자연과 생명에 대한 정서적 감수성으로부터 시작된 혜산의 시 세계는, 투철한 역사 의식에 바탕을 둔 참여적 성향을 띠게 된다. 그 이후에는 현실보다도 근원적인 인생 문제에 천착하여 삶의 의미나 영혼의 문제를 다룸으로써 원숙한 생에 도달한 그의 깊은 경지를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그가 자연의 결정체인 '수석(水石)'에 깊은 조예를 가지고 수집한 수석에서 얻은 시적 영감을 노래한 작품으로, '수석'이 표상하는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두루 섭렵하는 절대적인 경지를 이루어내고 있다.

이 시의 제목인 '유전도'에서 '유전'이란, 번뇌 때문에 생사(生死)를 수없이 되풀이하며 '미망(迷妄)'의 세계를 떠도는 일을 의미하는 불교 용어로, 이 시의 사상적 배경이 불교의 윤회 사상임을 알게 해 준다. 연 구분이 없는 33행의 단연시인 이 작품은 내용에 따라 4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단락은 1∼6행으로 끊임없이 유전하는 천지 자연을 보여 주고 있다. 바람과 구름, 구름과 강물, 강물과 바다가 서로 꼬리를 물고 변화하고, 바다가 햇살을, 달빛이 번개를, 노을이 강바람을 꼬리 물고 변화할 뿐 아니라, 언덕·산악·사막·도시·궁전·움막들도 무너지고 흘러간다는 표현을 통해 천지 자연이 상호 인과(因果)로 얼키고 설키면서 유(有)와 무(無)의 영원한 유전을 되풀이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2단락은 7∼16행으로 서로 모순되고 상충하는 것들의 영원한 유전을 노래하고 있다. 아우성과 침묵, 영화와 몰락, 횡포한 자와 비겁한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 …… 등등 모든 모순과 상충이 천 년이면 천 번을, 만 년이면 만 번을 무너지며 일어서며 영겁의 세월 속으로 사그러져 흙·물·바람 등이 되어 흐른다는 구절로써 영원한 유전을 노래하고 있다.

3단락은 17∼25행으로 희로애락과 약육강식의 허무한 유전을 나타내고 있다. 노여움·자랑·오만·겸손·사랑·미움 …… 등등 모든 인간의 감정이나, 쫓던 자와 쫓기던 자 …… 등등 강자·약자의 어떠한 것도 흙 속에 묻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모습을 통해 그 허무한 유전을 드러내고 있다.

4단락은 26∼마지막 행으로 지금까지 노래한 만물의 유전을 요약해서 다시 한 번 노래함으로써 천지 자연의 영원한 유전을 강조하는 주제연이다. 난 것은 모두 죽고, 죽은 것에서 다시 나는 것이 바로 만물의 유전 이치임을 제시하며,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삼라만상이 서로 꼬리를 물고 돌고 있는 유전의 바람일 뿐이라고 하여 시상을 마무리한다.

이처럼 이 시는 하나의 돌에서 무한한 시간과 무한한 공간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끊임없는 유전이라는 자연의 본질을 찾아내는 시인의 원숙한 혜안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한편, 2·3단락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많은 열거는 기묘한 형상으로 이루어진 수석에서 발견한 것으로, 결국은 우리가 살고 있는 인간 세상의 불합리하고 부정한 각종 모순상의 구체적 모습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인이 이 작품에서 말하려 한 것은, 이러한 모순과 상충의 양면성을 지닌 현실 세계에서의 삶의 진실에 대한 진지한 모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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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남수(朴南秀)

1918년 평양 출생

1933년 {조선문단}에 희곡 <기생촌>이 당선

1939년 정지용의 추천으로 {문장}에 <마을>, <초롱불>, <밤길>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41년 평양 숭인상업학교를 거쳐 일본 츄우오(中央)대학 법학부 졸업

1954년 {문학예술} 편집위원

1957년 조지훈, 유치환 등과 함께 한국시인협회 창립

1957년 제5회 아시아 자유문학상 수상

1959년 {사상계} 상임 편집위원

1973년 한양대 문리대 강사 역임 및 도미(渡美)

1995년 사망

시집 : {초롱불}(1940), {갈매기 소묘}(1958), {신(神)의 쓰레기}(1964), {새의 암장(暗葬)}(1970), {사슴의 관(冠)}(1981), {서쪽, 그 실은 동쪽}(1992), {그리고 그 이후}(1993), {소로(小路)}(1994)


이 시는 <아침 이미지>와 함께 박남수의 대표작으로, '새'를 존재론적 입장으로 접근하여 비정(非情)한 현대 문명으로 인해 파괴된 자연의 비극을 보여 주는 문명 비판의 주지적 경향의 작품이다. 시인의 감정을 완전히 배제한 채 이미지로만 보여 주고 있는 이 시는 1과 2가 서로 대응하는 관계로, 2는 1에 대한 부연 설명의 단락이 된다. 1에서는 이미지스트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는 한편, 3에서는 인간 존재에 대한 탐구로 지적인 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시인은 '새'로 표상되는 자연적 생명의 아름다움과 인간의 인위성, 파괴성, 잔인성을 대립시켜 시상을 전개하고 있다. '노래인 줄 모르면서' 노래하고, '사랑인 줄 모르면서' '따스한 체온을 나누어 가지는' 새는 바로 자연의 순수를 이루는 본질이다. 따라서 새는 억지로 의미를 부여하거나 가식, 위선하지 않는다. 이에 반해 인간으로 표상된 '포수'는 서슴지 않고 무자비한 파괴를 일삼는 존재이다. 포수가 총을 쏘기 전까지만 해도 한없이 아름다운 '순수' 그 자체이었던 새가 총탄을 맞는 순간, 원래의 아름다움과 순수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그곳에는 '피에 젖은 한 마리 상한 새'만 있을 뿐이다. 여기서 '상한 새'란 인간의 횡포에 의해 파괴된 자연의 비극상이다. 그러므로 이 시는 새가 가지고 있는 '노래'와 '사랑'을, 포수가 가지고 있는 '총'과 '한 덩이 납'과 대립시키는 방법을 통해 인간의 비정함이 삶의 순수성을 어떻게 파괴하고 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이 시는 본질을 도외시하고 현상에만 집착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질책하는 시인의 뜻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자연스럽지 못하거나 의도된 모든 것은 비순수라는 시인의 생각이 나타나 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순수를 지향하는 시인의 인생관과 시작 태도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이 시는 제목이 말해 주듯 아침에 대한 근원적 본질을 노래하고 있는 작품이다. 박남수는 모든 사물의 원초적 세계로 돌아가, 그 본질적 건강성을 회복하는데 주력하는 시작(詩作) 방법의 하나로 이미지를 중시하였다. 그는 "감각적 체험과 관련 있는 모든 단어가 이미지가 될 수 있으며, 그것들이 생명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상상력에 호소하도록 의도된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창작된 이 시는 결백한 서경적 조소성(彫塑性)에 의한 생생한 이미지로써 건강한 아침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이미지의 신선한 감각은 이 시의 최대 장점이지만, 이 시는 가슴에서 나온 감흥(感興)의 시가 아닌, 두뇌로 쓰는 지적(知的)인 시로 분류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시가 논리적이라거나 작품의 수준이 상대적으로 낮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전 12행의 단연시인 이 시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추보식 구성으로 기·승·전·결의 네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1∼2행의 첫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생성을 어둠 속에 있던 '새'·'돌'·'꽃'이 아침이 되어 제 모습을 드러내는 모습을 통해 보여 주고 있다. 일반적으로 부정적 이미지로 쓰이는 어둠을 이 시에서는 '낳고'·'낳는다'라는 표현을 통해 '온갖 물상'을 잉태하는 생명의 모태라는 긍정적 이미지로 그리고 있다. 3∼5행의 둘째 단락에서는 어둠이 아침과 자리를 바꾸는 모습을 서술함으로써 어둠의 소멸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굴복한다'는 표현은 어둠이 사라져 버린다는 뜻이다. 6∼10행의 셋째 단락에서는 물상의 잔치를 노래하고 있다. 밤새도록 어둠 속에서 '무거운 어깨'로 있던 물상들이 마침내 아침 햇살을 받음으로써 자연적 생의 율동을 회복할 뿐 아니라, 나아가 의욕적인 삶의 움직임으로까지 확대된 건강한 모습을 회화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금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이라는 구절은 시각을 청각으로 전이시킨 공감각적 이미지의 표현이다. 11∼12행의 넷째 단락은 아침의 신비로움을 '개벽'이라는 시어로 집약하여 시상을 응결시키고 있다.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삼라만상이 아침 햇살이라는 생명수를 받아 먹고 긴 잠에서 깨어나 힘차게 날개를 퍼덕거리는 것 같은 아침의 생동감이 '아침이면, / 세상은 개벽을 한다'는 시행 속에 함축되어 있다. 이같이 생동감 넘치는 아침의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많은 동사(動詞)를 사용하는 한편, 이러한 아침에서 얻어진 밝고 신선한 느낌을 회화적 이미지로 그려냄으로써 이미지스트로서의 박남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이 시는 박남수의 후기 대표작으로 관념의 표상으로만 인식하기 쉬운 '종'을 세련된 감각과 심상의 조형(造形)으로 형상화하여 자유를 향한 비상(飛翔)과 확신을 노래하고 있다.

주지적 계열에 속하는 이 작품은 표현 형식면에서도 시인의 지성적 통제가 이루어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전 4연이 모두 4행씩인 질서 있는 구성과 함께 각 연의 종결 방법이 동일하다. 즉, 1·2연과 3·4연을 각각 부사형과 서술 종결 어미로 끝맺고 있어 주지주의 시인으로 변모한 그의 후기시 세계의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시인은 '청동의 벽'인 종의 몸체를 '칠흑의 감방'으로, 울리지 않는 상태의 종소리를 어두운 감옥에 가두어 놓은 '억압'으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그로부터 울려 나오는 종소리를 '푸름'·'웃음'·'악기'·'뇌성' 등으로 변신하며 퍼져 나가는 '자유'의 모습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리하여 종소리는 '청동의 표면'에서 떠난 한 마리 '진폭의 새가' 된 다음, 마침내 '광막한 울음'을 우는 거대한 '하나의 소리'가 되어 인간의 삶과 꿈, 그리고 역사를 잉태하고 무한한 자유의 공간으로 퍼져 나는 것이다.


박남수는 언어 표현의 암시성을 중시하는 이미지의 시인이다. 시사적(詩史的) 측면에서 그는 정지용과 김영랑에 버금가는 언어와 형태미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아울러 언어에 형이상학적 깊이도 부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철저한 모더니스트인 그의 시적 경향은 암시적인 이미지로 사물의 존재에 대한 관념을 함축시킴으로써 한국의 전통적인 서정성을 지적(知的)으로 극복하고 새로운 서정을 이미지화하였다.

그러한 작품 세계를 일관되게 보여 주던 그가 말년에 이르러 생활시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음을 이 시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시는 평범한 사실의 제시로만 그치는 하나의 산문적 에피소드에 지나지 않지만, 고도의 시적 장치나 비유로 장식되어 있는 그 어떤 작품보다도 생생한 감동의 깊이를 전달해 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시는 인간 존재의 진실을 끊임없이 추구해온 시인이 노년에 이르러, 그것도 아내의 죽음을 체험한 후 더욱 깊어진 삶의 깊이를 담담한 어조로 보여 주고 있다. 아내를 저 세상으로 떠나보낸 후, 시인은 늙어 불편한 혼자몸으로 살아가는 자신의 생활을 단순히 '불편하다'는 말로 표현하고 있으나, 그것이 어찌 불편함뿐이겠는가? 그러므로 그 '불편함'의 이면엔 그가 아내를 한시도 잊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숱한 부침(浮沈)의 긴 세월을 동고동락한 아내에 대한 사랑이 짙게 배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팬티 / 끈이 늘어나 불편할 것도 / 불편하면서도 끙끙대고 있을 / 남편의 고충'까지를 예견한 아내가 그러한 불편을 대비하여 자신에게 이런저런 집안일을 '훈련'시켰다는 것을 알고 그간 성가시다며 짜증을 냈던 자신의 무지함을 뉘우치는 과정을 통해 아내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닫는 생의 진솔함이 잘 나타나 있다. 그러한 '불편'을 겪을 때마다 시인은 아내의 빈 자리를 깨닫게 될 뿐 아니라, 더 나아가 아내의 죽음을 통해 자신의 죽음을 깊이 인식하고 준비하는 생의 원숙함이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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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현승(金顯承)

남풍(南風), 다형(茶兄)

1913년 광주 출생

1934년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중 교지에 투고한 시 <쓸쓸한 겨울 저녁이 올 때 당신들>이 양주동의 추천으로 {동아일보}에 발표

1937년 숭실전문학교 문과 졸업

1951년 조선대학교 문리대 교수

1955년 한국문학가협회 중앙위원

1960년 숭전대학교 문리대 교수

1973년 서울시 문화상 수상

1975년 사망

시집 : {김현승 시초}(1957), {옹호자의 노래}(1963), {견고한 고독}(1968), {절대 고독}(1970), {김현승 시전집}(1974), {마지막 지상에서}(1977), {김현승의 명시}(1987),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1989)


일제 식민지하에서 강인한 의지와 민족적 낭만주의 경향의 시들을 발표하여 문단의 주목을 받은 바 있는 김현승은, 일제 말기에는 타협을 거부하여 붓을 꺾고 10년의 세월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해방 이후에야 비로소 다시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이 시는 종래의 생경한 수사(修辭) 취미가 사라진 대신, 완숙한 경지의 서정성과 사물의 본질을 깊이 보려는 경향으로 씌어진 김현승 문학의 제2기의 작품이다. 플라타너스라는 가로수를 '너'라는 단수 개념으로 의인화시켜 인생의 반려(伴侶)로 삼아 생에 대한 고독과 우수, 그리고 꿈을 간직한 사랑의 영원성을 노래하고 있다. 또한 간결한 시어의 구사로 시상을 압축, 리듬감 있는 운율로 시적 감각을 최대로 살리고 있다.

1연은 '파아란 하늘에 젖어' 있는 플라타너스의 모습을 통하여 인간과 마찬가지로 꿈을 가진 존재로서의 플라타너스를 보여 주는 부분이다. 2연은 자연의 예지를 드러내고 있는 부분으로, 사람처럼 사모할 줄은 모르지만, 자신의 몸으로써 그늘을 만들어 남을 쉬게 해 주는 플라타너스의 희생과 헌신적 사랑을 보여 주고 있다. 이것은 자연이 침묵으로써 인간에게 가르쳐 주는 사랑의 참뜻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자연의 참뜻은 인간에게 주는 예지나 교훈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원한 동반자로서의 역할을 말없이 수행한다는 데에 있다. 그리하여 3·4연에서 인생이라는 고단한 길을 걷는 화자가 '호올로 되어 외로울 제', 그늘을 늘여 주는 플라타너스의 모습이야말로 인간과 함께하는 삶의 반려자로서의 자연의 역할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플라타너스에게 화자는 '뿌리 깊이 / 영혼을 불어 넣어' 줌으로써 자연과의 교감 내지 일치하고 싶어하지만, 결국 이 같은 소망이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나는 너와 함께 신이 아니다!'라는 것은, 인간이 유한적 존재,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지닌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자, 고독할 수밖에 없는 실존적 존재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인간의 한계 의식 또는 운명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길이 다하는 어느 날'이란 일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죽음의 시간이며, '검은 흙'은 '수고하고 짐진 자'로서의 인간이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곳으로 죽음의 세계이다. 그 같은 죽음의 시간을 맞이할 때 갖게 되는 고독이야말로 인간의 본질이며, 죽음이라는 것도 유한적 존재인 인간의 어쩔 수 없는 숙명임을 깨닫게 된 화자는, 마침내 '너를 지켜 네 이웃이 되어' '별과 창이 열린' 세계로 영원하기를 기원한다. 이렇게 이 시는 '자연 ― 인간 ― 신'의 상관 관계 속에서 삶을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꿈과 의지를 담고 있다.


이 시는 사랑하는 어린 자식을 잃은 슬픔을 기독교적 신앙으로 극복·승화시킨 작품으로, 시인은 화려한 꽃 그 자체보다 열매를 소중히 여기고, 겉으로 나타나는 웃음보다 내적으로 응결되는 눈물에서 인생의 가치와 삶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이 시는 정제된 형식은 가지고 있지는 않으나, 행과 연의 관계가 감정의 흐름에 따라 배분됨으로써 작품의 긴장감을 더해 주는 한편, 격앙된 심적 상태를 단정적인 어투로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드리라 하올 제', '나아종 지닌 것', '지어 주시다'와 같은 독특한 운율의 감각적 시어들을 사용함으로써, 이러한 시적 자아의 격정을 순화시키는 한편, 기도조의 분위기 속에서 시적 자아의 소중한 정성을 드러내는 데 성공하고 있다.

시인은 '웃음'·'가식'·'순간'·'비순수'를 표상하는 꽃과, '눈물'·'진실'·'영원'·'순수'를 상징하는 열매를 대립시키는 방법으로 시상을 전개하고 있는데, 그가 훗날 작가의 변(辯)―"인간이 신(神) 앞에 드릴 것이 있다면 그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변하기 쉬운 웃음이 아니다. 이 지상에 오직 썩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신 앞에서 흘리는 눈물뿐일 것이다."―에서 밝힌 것처럼 이 작품은 본질적인 삶의 추구와 생명의 순결성을 노래하고 있다. 다시 말해 이 시는 인간에게 있어 가장 순수하고 값지며 궁극적인 것은 오직 눈물뿐이라는 명상적 내용을 담고 있으며, '역설'이 작품의 중심 수사가 된다.

그러므로 이 시는 어린 아들을 잃어버린 시인의 처절한 육친애를 표상하는 '눈물'이 세속적인 슬픔을 뛰어넘어 신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참회의 순수한 '눈물'로 깊어졌을 때, 그 눈물은 마침내 진실한 가치의 실체, 즉 순수한 생명의 응결체가 되어, 비로소 삶의 구원을 얻고 육신의 고통을 극복하게 된다는 기독교적 정신을 표현하고 있다.